알랭 베르세 스위스 대통령과 스위스국립은행·유비에스·크레디스위스 등 고위 관계자들이 19일(현지시각) 베른에서 유비에스가 크레디스위스를 30억스위스프랑(약 4조2300억원)에 인수하기로 했다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베른/EPA 연합뉴스
신뢰와 안전의 대명사였던 스위스 2위 은행 크레디스위스(1856년 개업)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것은 거듭된 비리와 스캔들로 굳건했던 고객들의 믿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금융 세계화’로 예전 같은 ‘비밀주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각종 스캔들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실망한 고객들의 예금 인출이 이어지며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블룸버그>는 지난 16일 크레디스위스 위기에 대한 분석 기사에서 이 은행을 둘러싸고 그동안 “불가리아 마약조직의 ‘돈세탁’ 관련 유죄 판결, 모잠비크 ‘참치 채권’을 둘러싼 비리, 전직 간부가 관여한 스파이 사건 등 불상사가 끊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2021년 한해에만 월가를 뒤흔든 대형 스캔들인 한국계 투자자 빌 황의 아키고스자산관리에 대출해 55억달러의 손실을 기록했고, 영국 ‘그린실캐피털’의 부실자산을 은행 고객들에게 팔아 투자금 100억달러가 동결됐다. 스위스 금융당국은 “중대한 감독의무 위반이 있다”는 뼈아픈 지적을 남겼다.
영국 <가디언>은 지난해 2월 크레디스위스가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 일가가 횡령한 50억~100억달러의 자금을 가명으로 수탁해준 1986년 스캔들 등 21건의 스캔들 사건 일지를 보도했다. <가디언> 등이 참가한 국제 탐사언론은 크레디스위스의 고객 계좌와 관련된 내부 문서를 입수해, 이 은행이 고문·마약밀매·돈세탁·부정부패 등 중범죄에 연루된 3만명 고객으로부터 1000억스위스프랑을 예탁받아 보호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러한 스캔들의 여파로 지난해 마지막 석달 동안 고객들이 크레디스위스에서 1100억스위스프랑(1200억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인 예금을 인출했다. 그와 동시에 한때 85스위스프랑까지 올랐던 주가는 10일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으로 국제 금융계가 요동치자 1.5스위스프랑 전후로 폭락했다.
스위스 은행들은 예전엔 철저한 비밀보호를 바탕으로 ‘검은돈’도 마다하지 않고 수탁받아 이익을 챙기는 영업을 해왔다. 이런 비밀보장 관행은 세계화 이전에 각국 금융산업이 개방화되지 않은 조건에서 가능했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7년 자동정보교환(AEOI) 및 공동보고기준(CRS)에 입각한 국가 간 조세징수 협정을 맺은 뒤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는 종말을 맞았다. 미국은 스위스 은행들에 수사에 필요한 계좌 정보를 제공하라고 강제했다. 스위스 은행에 감춰졌던 부조리가 드러나며 스캔들이 잇따르고 헤어날 수 없는 경영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악셀 레만 크레디스위스 회장은 19일 매각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회사와 세계 금융시장에 굉장히 슬프고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