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서방은 28일 러시아 중앙은행과 국부펀드, 러시아 재무부와의 거래를 동결하겠다고 밝혔다. 러시아가 해외 은행에 보유한 달러 등 외환에 손을 못 대게 하겠다는 것이다. 사진은 러시아 루블화. 모스크바/타스 연합뉴스
미국과 유럽 등이 지난 28일 꺼내든 ‘러시아 중앙은행과의 거래 중단’이라는 카드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핵 위협에 맞먹는 ‘경제 핵폭탄’이라고 할 수 있다. 루블화 폭락과 인플레이션을 심화시켜 러시아 경제를 초토화하고 푸틴 대통령의 전쟁 금고를 타격하는 효과가 예상된다.
미국 재무부는 지난 28일 러시아의 중앙은행, 국부펀드, 재무부와의 거래를 전면 차단한다고 밝혔다. 이에 영국·일본도 동참하겠다고 밝혔고,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연합(EU) 국가들도 가세할 예정이라고 미국 당국자들이 말했다. 미국은 이란·베네수엘라·시리아 등에 중앙은행 규제를 가한 적 있으나, 러시아라는 대국을 상대로 그것도 서구 국가들이 똘똘 뭉쳐 이 조처에 나선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이번 조처의 핵심 목표는 러시아가 원유·가스 등을 팔아서 쌓아둔 외환보유고에 손을 못 대도록 묶는 것이다. 마이클 번스탬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연구원은 러시아의 전체 외환보유고는 약 6400억달러(약 770조원)이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인 4000억달러는 뉴욕·런던·베를린·파리·도쿄 등 외국의 중앙은행이나 상업 은행에 예치돼 있다고 분석한다. 러시아 안에 보유한 규모는 120억달러에 그치며, 나머지 약 1390억달러는 금, 840억달러는 중국 채권이라고 <뉴욕 타임스>는 전했다.
러시아가 자기 돈인 4000억달러의 외환보유고에 손을 못 대면, 우크라이나 침공 개시 이후 30% 폭락한 자국 통화 루블화의 추가 하락을 막기 어려워진다. 달러로 시장의 루블화를 매입해서 루블화 가치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게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전쟁 이전인 2월 중순 1루블은 미화 1.3센트 수준이었으나, 지난달 24일 개전 직후 떨어지기 시작해 27일 서방의 러시아 은행들에 대한 국제은행간결제망(SWIFT) 퇴출 결정을 거치면서 추락을 거듭했다. 구글 파이낸스 자료를 보면, 미국의 러시아 중앙은행과의 거래 중단 발표 이후 1일 한때 1루블은 0.96센트로, 1센트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러시아는 국제은행간결제망 퇴출 제재 이후 루블화 폭락을 막기 위해 금리를 20%로 올렸고, 외환 확보를 위해 수출기업들에 보유 외환의 80%를 매각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이번 중앙은행 제재로 러시아는 거시경제 관리를 위한 주요 수단을 잃게 됐다. 루블화의 구매력이 약화되면, 수입품 가격이 올라 물가는 더 폭등하게 돼 있다. 루블화 추가 폭락, 인플레이션, 경기 침체 등 악순환이 예상된다. 그 직접적인 여파를 감내해야 하는 러시아 시민들은 이미 믿을 수 있는 ‘달러’ 확보를 위해 현금인출기에 줄을 서고 있다. 셸·비피(BP) 등 글로벌 기업들은 러시아에서 철수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처가 그동안 언론이 주목해온 국제은행간결제망 퇴출 조처보다 훨씬 파장이 크다고 말한다. 미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의 조시 립스키 국장은 4000억달러 외환보유고를 묶는 것은 “하룻밤 사이 오스트리아 국내총생산(GDP) 전체를 날리는 것”이라며 이번 조처는 “러시아라는 요새”를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폴리티코>에 말했다.
이 조처로 푸틴 대통령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금력이 약해지게 됐다. 루블화 폭락에 따른 국민들의 불만이 치솟아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극단적 압박 속에 엄청난 비극을 불러올 극단적 총공세에 나설지, 우크라이나 정부와 적정선에서 타협할지는 푸틴 대통령의 선택에 달렸다.
황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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