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광장 앞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EPA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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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이 동아시아에 끼칠 영향은 적지 않다. 러시아가 미사일을 퍼붓기 하루 전인 2월23일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군에 “경계태세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그는 최근 들어 러시아-우크라이나 상황을 중국-대만에 비유하는 언론을 향해 “두 상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대만 사회에 끼칠 정치적 영향을 무시하지 않되, 금방이라도 중국이 침공해올 거라고 보는 견해에 대해 경계하는 입장이다. 다만 차이잉원은 지속적으로 무기 수입을 늘리고 있다. 올해 대만 국방예산은 17조3천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지난 연말 이후 우크라이나 인접 지역에서 러시아가 군사력을 집중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자 대만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대만을 비교하는 입장들이 나왔다. 중화권의 보수주의자들은 미국이 중국에 관심을 집중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관여하지 못할 것이라거나, 우크라이나에 관여하지 않을 경우 중국의 지정학적 위협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국민당 등을 비롯해 중국과의 관계 회복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은 미국이 우크라이나 사태에 개입하지 않는 것처럼 대만에 대해서도 그럴 것이라고 여긴다. 이런 주장은 중국과의 관계 회복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을 실는다. 멀리 우크라이나에서 참극이 시작된 상황에서도 자기 입장의 유불리만 신경 쓰는 셈이다.
우크라 여파…대만 “중국 경계 강화”
중국도 ‘현상유지’ 위한 복잡한 속내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국제정세의 격변에 대한 대중의 인식 변화는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 때문에 중국 공산당의 강권 통치를 비판하면서도, 대만 사회의 비민주성이나 한족 중심성을 비판해온 사회운동단체 ‘뉴블룸’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마치 중국이 금방이라도 대만을 침공할 것처럼 떠드는 정치 세력에 대해 비판적이다. 국제정세의 격변을 악용해 반세기 넘게 독재 정권을 유지한 보수 세력이 득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도 속내가 복잡하다. 왕이 외교부장은 “모든 나라의 주권·독립·영토를 보전하는 것은 유엔 헌장에 따라 만들어진 국제관계의 기본 원칙이며, 우크라이나도 예외가 될 수 없다”면서도, “2015년 체결된 민스크 협정(우크라이나 정부와 돈바스 지역 반군 간 체결)이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을 위한 유일한 출구”라고 말했다. 러시아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사태를 관망하겠다는 태세다. 중국이 나토의 동진에 대해선 비판하면서도 러시아의 침략 행위를 에둘러 비판하는 것은 원칙이 아니라 실리가 중국 정부의 판단 기준임을 방증한다. 이처럼 중국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러시아에 대한 역사적 불신, 중앙아시아에서의 격변과 유럽연합과의 관계 악화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중 압박이 최대 관심사인 시진핑 국가주석은 현상유지를 가장 선호한다. 그러나 이런 계산법은 패권 경쟁의 강화로 이어질 뿐이다.
한편으로 동아시아에서 시민사회의 반전 목소리도 확대되고 있다. 지난 1일 타이베이에 위치한 러시아대표부 앞에선 160여곳 대만 사회운동단체와 우크라이나인들이 함께 전쟁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 행동은 앞으로 매주 금요일마다 계속될 예정이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중국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반전 목소리는 적지 않다. 지난달 26일 새벽, 한 베이징 시민은 러시아문화센터 문 앞에 붉은 래커 스프레이로 전쟁을 규탄하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는 시민들을 향해 “벽 너머 세계를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중국대륙의 국제주의자’ 명의의 성명도 “러시아의 침략과 나토의 무절제한 확장 모두에 반대한다”며, “어떠한 제국주의의 간섭도 받지 않을 우크라이나 인민의 권리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침묵하는 다수는 균형적 시각을 갖고 이 전쟁에 반대하고 있다.
국경을 넘어선 반전 운동은 평범한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전쟁이 벌어져 어느 한쪽의 승리로 끝난들 그것이 어찌 시민의 승리이겠는가?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평범한 사람들의 죽음은 보상받을 수 없다.
미국, 중국, 러시아, 나토 등의 제국주의 경쟁이 격화되면 세계는 다시 전쟁이라는 과오를 반복할 위험이 크다. 20세기에 일어난 두 번의 세계 전쟁이 인류를 말살 직전으로 몰아넣었다면, 다가올 세계 전쟁은 인류 자체의 파멸을 안겨줄 뿐이다. 그것은 바다 건너 멀리서 벌어질 일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 그 자체다. 이런 상황에서 유력 대선 후보들이 군비 경쟁을 고조시키는 발언을 남발하는 것은 위험천만하다. 동아시아 평화는 미국의 반대로 가능하지도 않을 핵무장으로도, 혹은 케이(K) 방위산업의 발전으로도 확보될 수 없다.
베트남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세계 시민들이 거리로 나가 ‘전쟁 반대’를 외치며 미국과 러시아의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했던 것은 결코 무기력한 양비론도, 현실과 무관한 원칙론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 각국이 민족주의와 쇼비니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함께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키이우(키예프)를 향해 자국군 탱크를 진격시키자 러시아에선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반전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2월24일부터 3월1일까지 주요 도시에서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냈고, 약 7천명이 체포됐지만, 시민불복종은 계속되고 있다. 평화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평범한 사람들은 하나다.
시민 사회선 국경 넘어 “평화” 요구
때아닌 ‘군비 증강’ 목소리 경계해야
이런 상황에서 나토의 핵심 멤버인 독일 정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대체로 수호해온 평화주의 외교노선을 파기했다. 지난달 27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2% 이상으로 올리고, “무기 현대화에 1천억유로를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나아가 대전차 무기 1천정과 군용기 격추를 위한 지대공미사일 스팅어 500기를 우크라이나에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독일이 군비를 증강하고, 무기를 지원하면 러시아 시민들의 자발적인 반전 운동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러시아 내 반전 여론이 무력 침공 찬성 쪽으로 기울면 푸틴에게는 매우 좋은 일일 것이다. 2020년 개헌을 통해 자신의 출마 이력을 삭제한 푸틴은 다음 대선에서 또 출마할 것이 예상되는데, 반전 시위는 정치 판도를 뒤집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푸틴의 광기는 나토의 동진에 멈추지 않았다. 유럽연합의 무기 증강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상황을 극단으로 밀어넣을 뿐이다.
동아시아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드 배치 등 무분별한 무기 증강을 지지하거나 케이(K)방위산업을 찬양하는 사기꾼들에게 투표하는 것이 아니다. 타이베이와 베이징, 서울과 도쿄의 시민들이 제국주의 전쟁의 위험을 함께 막아서고자 거리로 나설 때, 평화는 회복된다. 모스크바와 베를린에 모인 수십만명의 반전 시위는 동아시아의 평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매주 금요일 저녁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반전 집회를 주목해야 할 이유다.
홍명교 동아시아 연구활동가. 플랫폼C 활동가. 동아시아 이야기를 씁니다. 각 사회의 차이를 이해하고, 같은 꿈을 지향하자(異牀同夢)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상을 품은 동아시아의 꿈(理想東夢)이라는 뜻도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