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군이 최근 러시아군을 몰아낸 동북부 도시 이줌에서 19일(현지시각) 한 노인이 무너진 학교 건물에서 땔감을 가져가고 있다. 이줌/AP 연합뉴스
6개월 가량의 러시아군 지배에서 최근 벗어난 이줌 등 우크라이나 동북부 지역 주민들이 폐허 속에서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전기·가스·식수가 아직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데다가 최근 기온도 뚝 떨어지면서 또 다른 ‘생존 투쟁’을 치르고 있다.
<에이피>(AP) 통신은 최근 우크라이나군이 수복한 하르키우주 이줌의 노인들이 땔감과 파괴된 주택 수리용 자재를 구하려고 폐허가 된 도시 곳곳을 뒤지고 다닌다고 20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얼마전까지 러시아군이 기지로 사용하던 학교 건물에서는 창살이나 칠판 등으로 이용되던 나무들을 땔감으로 쓰려고 수집하는 노인들 여러 명이 바쁘게 움직였다.
19일 건물 잔해 속을 뒤지던 주민 올렉산드라 리센코(75)는 “우리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다. 찻물을 끓이고 귀리죽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모으고 있다. 이 학교는 우리 손자들이 다니던 곳인데, 이제는 내가 ‘약탈’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노인 근처에서는 한 남성이 러시아군이 남기고 간 낡은 자동차의 덮개를 자전거에 싣고 있었다. 이 남성은 러시아군을 상징하는 문자 제트(Z)가 페인트로 칠해진 이 덮개로 깨진 유리창을 가릴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침공 전 4만명에 이르던 이 도시는 주민 절반 정도가 피란을 떠나면서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으며, 지난 17일에는 고문당한 흔적이 있는 시신 등 440명 이상이 매장된 묘지가 발견됐다. 전투가 특히 극심했던 이줌 남쪽 마을 카먄카는 1200여명의 주민이 모두 떠나 현재 단 10명이 살고 있다고 통신은 전했다. 이줌은 지난 3월 초 러시아군이 점령한 이후 전화도 끊기면서 완전히 고립됐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가족이나 친척들은 살아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았다. 카먄카에서 4명의 가족과 함께 사는 나탈리야 즈도로베츠는 “우리는 진공 속에 있었다. 세계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몰랐다. 밖을 나가지도 못해 이웃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군이 이 지역을 탈환한 지 열흘이 지났지만 수도·전기·가스가 다시 제대로 공급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인 데다가 통신도 완전히 복구되지 못했다. 이동전화 신호가 미약해 간단한 문자 전송이나 통화만 가능하고, 라디오를 켜도 러시아쪽 선전 방송 외에 다른 방송은 수신되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말 이후 처음으로 19일 우편물 배달용 차량이 도시에 도착하자 100명 이상이 가족·친척 등의 소식을 듣고 싶어 차량 주변으로 몰렸다. 자녀들이 소포로 보낸 겨울 옷을 받아든 볼로디미르 올리자렌코(69)는 “우편 배달이 되니 너무 기쁘다. 삶이 조금은 더 나아졌다”고 말했다.
러시아군이 곳곳에 흩뿌린 지뢰도 주민들의 일상 회복을 가로막는 위협 요인이다. 우크라이나군은 지뢰를 하나 하나씩 확인해 제거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19일 낮 내내 지뢰 제거에 따른 폭발음이 끊이지 않았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날 밤 대국민 연설에서 러시아로부터 탈환한 지역에서 이제 ‘속도’에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군인들의 진군 속도, 일상 생활을 회복하는 속도”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 지역에는 아직도 힘든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에이피>는 지적했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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