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치러진 프랑스 사회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세골렌 루아얄 의원이 두 남성 경쟁자인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재무장관과 로랑 파비위스 전 총리를 압도적 표차로 물리치고 프랑스 첫 여성 대통령 자리에 바짝 다가섰다. 멜/AP 연합(사진 좌)
16일 미국 의회의 첫 여성 하원의장으로 추대된 낸시 펠로시 민주당 의원이 워싱턴 기자회견장에서 손을 들어 올리고 있다. 펠로시 의원은 미국 정치사상 첫 여성 하원 원내총무, 원내대표에 이어 또다시 첫 하원 의장이란 기록을 세웠다. 워싱턴/AP 연합(사진 우)
루아얄 프랑스 대선후보-결혼않고 25년 동거 네 아이 낳고 길러
펠로시 미 최초 하원의장-갑부 남편이 골라준 아르마니 입는 좌파
펠로시 미 최초 하원의장-갑부 남편이 골라준 아르마니 입는 좌파
미국과 프랑스에서 여성 정치인의 대약진이 눈부시다. 16일 프랑스에선 내년 4월 대선의 사회당 후보로 세골렌 루아얄 의원이 뽑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꿈꾸게 됐다. 미국에선 낸시 펠로시 민주당 의원이 첫 여성 하원의장에 추대됐다. 서구 여성 정치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한 두 풀뿌리 여성 정치인의 성장 배경과 정치 이력, 정책 노선 등을 집중 조명했다. 8남매 대가족의 넷째 새로운 좌파 상상력으로
‘가족의 가치’ 깃발 활짝-루아얄 프랑스 대선후보 프랑스 사회당 대통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세골렌 루아얄(53) 의원은 여성성을 바탕으로 개혁을 추구해온 좌파 정치인이다. 루아얄은 16일(현지시각) 21만9000명의 사회당 당원이 직접 참가한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60.6%를 얻은 것으로 집계돼 당선이 확실시된다고 스테판 르 폴 사회당 대변인은 17일 밝혔다. 경쟁자였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57) 전 재무장관은 20.8%, 로랑 파비위스(60) 전 총리는 18.5%를 얻는 데 그쳤다. 루아얄은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우파 정권의 인기가 바닥을 기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내년 4월 선거에서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가족과 공동체의 가치 수정=루아얄은 육군 대령인 아버지가 1950년대 아프리카에서 무관으로 근무할 때 세네갈 다카르에서 여덟 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는 대가족을 배경으로 성장한 인물답게 가족과 가정, 어린이와 교육 문제의 개혁에 열정을 쏟았다.
엘리트 코스인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한 그는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82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 뒤 88년 의회에 진출한 뒤 92년 환경부 장관을 맡으면서 그의 개혁적 상상력은 여느 좌파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우선 폭력적인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어린이들이 무차별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운동을 펼쳤다. 어린이 보호와 가족의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섬세하고 평화적인 여성 정치가의 이미지를 굳혔지만, 일부일처제를 강조하는 미국식 가족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자신 국립행정학교 동창인 프랑수아 올랑드 현 사회당 제1서기와 70년대 말부터 동거하면서 네 아이를 낳아 길러냈다. 이들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시민연대협약’(PACS)에 따라 자녀양육이나 사회보장에서 부부와 같은 혜택을 누리고 있다. 99년 11월 프랑스 의회에서 통과된 ‘시민연대협약에 관한 법’은 성인이라면 누구나 함께 살 권리를 인정하는 법률이다. 그는 2002년 2월 가족법 개정안을 발의해 동성애자 부부도 이 법률의 적용 대상이 되도록 했다. 새로운 좌파적 상상력=최근엔 교육환경의 개혁에 많은 관심을 돌렸다. 그는 “너무나 많은 청소년들이 성 취향에 대해 폐쇄적인 학교 때문에 마약과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며 “학교는 관용과 보살핌의 장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교사와 양호교사를 대상으로 ‘보살핌의 윤리’를 강화하기 위한 ‘사랑의 행복’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급한 것도 그였다. 또 사회당 집권 기간의 성과인 주 35시간 노동제를 교사들에게도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데 대해서도 과감하게 비판했다. “교사들은 방과후 사적인 과외 따위를 하는 대신 학교 구내에서 더 오랫동안 머물러야 한다”고 발언해 많은 교사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는 선거운동 기간에 경쟁자인 스트로스칸과 파비위스를 겨냥해 ‘남성 쇼비니스트’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의 개혁적 행보는 확실히 ‘남성 쇼비니즘’에 빠진 옛 좌파들보다 참신하다. 그러나 그가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서 외교, 군사, 안보 등 굵직한 정책에서도 참신한 개혁의 상상력을 발휘할지에 대해선 아직도 불안한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내년 4월에 치러질 프랑스 대선은 그의 능력에 관한 최종 검증의 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상수 기자 leess@hani.co.kr
세골렌 루아얄 △1953년 아프리카 세네갈 다카르 출생 △프랑스 육군 대령의 여덟 자녀 가운데 넷째 △엘리트 코스인 국립행정학교(ENA) 졸업 △1982년까지 공무원 △1982~1988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대변인 겸 특별보좌관 △1988~1997년 가족부 차관, 환경부 장관 △2000~2002년 리오넬 조스팽 행정부의 교육부 차관, 가족부 차관 △2004년 3월 푸아투샤랑트주 지사 당선 △국립행정학교 동기인 프랑수아 올랑드 회당 제1서기와 25년째 동거. 네 자녀 △2005년 〈파리 마치〉와 인터뷰에서 대선 출마 뜻 밝혀
낸시 펠로시 △1940년 볼티모어 출생 △이탈리아계 미국인 정치가문에서 5남1녀 중 막내로 출생 △아버지 하원의원, 볼티모어 시장, 오빠도 볼티모어 시장 지냄 △1962년 워싱턴 트리티니 칼리지 졸업 △결혼 후 남편 폴 펠로시의 고향인 샌프란시스코에 정착 △2남3녀의 어머니이자 손주 다섯을 둔 할머니 △1987년 보궐선거에서 하원의원에 처음 당선된 뒤 내리 10선 △하원 정보특별위·세출위 등 활동 당내 진보그룹인 코커스 창립멤버 △2002년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
펠로시 미 최초 하원의장
이민가정 막내딸 부자동네 아줌마에서 민주당 상징으로 우뚝 낸시 펠로시(66) 민주당 원내대표가 16일 의원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차기 하원의장에 추대됐다. 이로써 미국에 새로운 여성정치 시대가 열렸다. 그는 첫 여성 하원 원내총무, 원내대표에 이어 또다시 첫 하원의장이란 새 기록을 세웠다. 내년 1월3일 110대 하원이 개원하면 대통령 승계 서열 2위(1위는 부통령)인 하원의장에 취임한다. ‘아르마니’ 입는 골수 좌파=그는 이날 하원의장에 추대되는 영광을 안았지만, 후임 원내대표 경선에서는 자신이 밀었던 후보가 큰 표차로 떨어지는 쓴맛을 봤다. 이로써 ‘불안한 출발선’에 서게 됐지만, 중립을 지키지 않았던 자신의 태도에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현 원내 부대표 스테니 호이어 의원을 징벌하려고 했으나 패하자,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그의 승리를 기꺼이 축하하는 여장부 기질을 보였다. 2500만달러 재산을 가진 갑부 남편이 골라다 주는 ‘조르조 아르마니’를 맵시나게 입는 민주당 골수 좌파 정치인 펠로시는 이처럼 선호가 분명하다. 이런 단호함과 조직력, 그리고 전국적 정치인으로서 필수 요소인 모금력은 그를 47살의 늦깎이 하원의원으로 만들었다. 특히 ‘캘리포니아 골드’로 불릴 정도로 선거자금 모금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의 정치기질은 가계로부터 물려받았다. 동부 볼티모어 이탈리아 이민가정의 5남1녀 중 막내딸로 태어난 그는 ‘루스벨트 민주당원’인 아버지 토머스 달레산드로의 무릎에서부터 남성들의 무대인 정치판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볼티모어 시장,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다. 오빠도 대를 이어 볼티모어 시장을 지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정치에 맘먹었던 건 아니다. 대학 시절 만난 남편을 따라 남편의 고향인 샌프란시스코 부자 동네에 정착한 그는 한때 영락없는 유한주부였다. 36살 때 민주당 주지사 후보의 선거홍보물에 우표를 붙이는 일을 하면서 정치에 발을 들여놨다. 5남매 키운 현실주의자=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1987년 자신의 지역구인 캘리포니아 제8선거구의 현역의원인 살라 버튼이 암에 걸리면서 출마를 권유했다. 그는 이 보궐선거에서 처음 당선된 뒤 평균 81%의 득표로 10선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지역구는 49년 이래 한 번도 공화당에 내준 적이 없는 민주당 아성이 됐다. 공화당 쪽에선 그를 ‘샌프란시코 리버럴’이라고 비야냥댄다. 하지만 그는 독실한 가톨릭신자이면서 낙태에 찬성하고 사회정의 실현과 인권보호 등 민주당 좌파의 노선을 한결같이 지켜오고 있다. 94년 깅그리치 선거혁명 이후 공화당에 연전연패하던 민주당원들의 변화에 대한 갈망을 타고, 2001년 민주당 하원 원내 부대표에 선출됐다. 2002년에는 딕 게파트 원내대표가 대선 출마를 위해 사임하면서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하원 원내대표가 됐다. 원내대표로서 처음 치른 2004년 선거에서 대패한 그는 컨설턴트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데올로기 공세 수위를 낮추고 공화당의 약점을 공략하는 전략으로 2006년을 준비했다. 말끝마다 5남매의 엄마임을 강조하는 그는 워싱턴의 기성정치를 잘 아는 정치인이면서도 뭔가 다르다. 동료 의원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가 현실주의자라고 평한다. 중간선거 승리 직후 조지 부시 대통령과 초당적 협력을 다짐하고 있지만, 부시 행정부의 목줄을 죄어야만 2008년 대선 승리가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것이다. 워싱턴/류재훈 특파원 hooni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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