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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냐면

건국 이래 처음? ‘대한민국’의 출판금지 가처분 패소 [왜냐면]

등록 2023-06-12 19:07수정 2023-06-13 02:35

국군방첩사령부가 23일 부승찬 전 국방부 대변인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사진은 지난 19일 오후 제주시 김만덕기념관에서 부 전 대변인이 자신의 신간 \'권력과 안보-문재인 정부 국방비사와 천공 의혹\' 북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국군방첩사령부가 23일 부승찬 전 국방부 대변인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사진은 지난 19일 오후 제주시 김만덕기념관에서 부 전 대변인이 자신의 신간 \'권력과 안보-문재인 정부 국방비사와 천공 의혹\' 북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최종호ㅣ변호사

자력구제가 금지된 현대사회에서 민사소송은 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런데 법적 근거가 없거나 박약함에도 소를 제기하는 방법으로 이를 악용하는 경우가 있다. 일단 민사소송이 시작하면 상대방은 응소해 다퉈야 한다. 물론 매우 황당한 내용이라면 간단히 끝나지만, 남을 괴롭히기로 마음먹고 시작한 사건이 그렇게 단순할 리가 없다. 실제 벌어진 일에 약간의 양념을 더한 뒤, 그럴듯한 법적 논리를 구성하면 일단 소송으로서의 외형은 갖출 수 있다. 보통 이런 식의 소송은 가진 자가 없는 자를 핍박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어떤 제도적 규제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정당한 권리행사와 괴롭힘을 일률적으로 판단할 기준이 없으므로 쉽지 않다. 결국은 양심과 양식으로 대표되는 사회의 건전한 상식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올해 2월 초순 <권력과 안보: 문재인 정부 국방비사와 천공 의혹>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국방부 대변인을 지낸 저자가 재직 중에 경험한 각종 사건에 대한 자신의 감상이나 소회 등을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 출간 한 달 뒤인 3월 초순 신청인 ‘대한민국’은 ‘출판 및 판매금지’를 구하는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 책이 대한민국의 군사기밀을 누설했다는 것이다.

&lt;권력과 안보: 문재인 정부 국방비사와 천공 의혹&gt; 표지. 해요미디어 제공
<권력과 안보: 문재인 정부 국방비사와 천공 의혹> 표지. 해요미디어 제공

한 부분을 예로 들면, 한미안보협의회의(SCM)에 참석한 미국의 국방부장관이 ① ‘중국을 추격하는 위협으로 규정’하면서 ② ‘한국도 중국의 경제적 강압과 위협의 피해자’이며 ③ ‘한국과 일본의 안보협력이 필요’하며 ④ ‘힘닿는 한 동맹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으니 ⑤ ‘서욱 국방부장관이 미국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한다’는 발언이 대한민국의 군사기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미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미국의 안전보장에 관한 방침이나 의례적 인사가 무슨 군사기밀인가? 아니, 그 이전에 미국 국방부장관의 발언이 대한민국의 군사기밀에 해당할 여지가 있는가? 이에 대해 신청인은 “동맹국 간의 신뢰를 훼손시켜 대미 외교관계에서 국가의 입지를 크게 제한되게 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물론 평가는 각자의 몫이다.

서울서부지방법원은 5월22일 이 신청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이 책이 군사기밀을 누설했는지 여부는 살펴볼 필요도 없고, 애초부터 신청인이 출판 및 판매금지를 구할 권리, 즉 ‘피보전권리’ 자체가 없다고 했다. 심리 과정에서 신청인은 군사기밀을 누설한 저자가 형사처벌을 받아야 한다거나, 해당 군사기밀이 국가의 소유이므로 방해제거청구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가의 형벌권은 민사재판에서 주장할 수 있는 사권이 아니다. 또한 군사기밀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가 ‘유체물 및 전기 기타 관리할 수 있는 자연력’(민법 제98조)에 해당할 리도 만무하다. 결국 이 사건 신청은 최소한의 법적 근거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으로 분명히 드러났다.

누구나 재판을 시작하려면 인지를 붙여야 한다. 하지만 국가가 자신에게 돈을 내는 것은 무의미하므로 대한민국은 인지를 붙일 필요가 없다. 또한 국가기관의 직원은 변호사가 아니더라도 소송 수행자가 될 수 있다. 즉 국가(여기서는 행정부)는 마음만 먹으면 별다른 부담 없이 국민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국가가 처음부터 어떤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국민을 상대로 재판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 신청과 같이 피보전권리 그 자체가 없는 경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알고 했어도 문제고, 모르고 했어도 문제다.

나는 이 사건에서 피신청인을 대리해 승소했다. 대한민국이 국민을 상대로 ‘출판 및 판매금지’ 가처분을 신청해 패소한 사건은 건국 이래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변호사로서 하나의 선례를 만들어낸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쩐지 모를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다. 나는 왜 부끄러워하는가?

대한민국은 신청을 기각하는 법원의 결정에 대해 5월29일 항고하면서 송달료 5만3258원을 납부했다. 물론 이는 국민이 낸 세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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