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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파업이 ‘웬만하면 불법’인 나라 / 이종규

등록 2022-09-04 12:44수정 2022-09-05 02:49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와 하이트진로 화물기사 등 손해배상·가압류 당사자들이 지난 31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회의장에서 열린 기자회견 도중 ‘노동자의 삶 파괴하는 손해배상 금지하라’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와 하이트진로 화물기사 등 손해배상·가압류 당사자들이 지난 31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회의장에서 열린 기자회견 도중 ‘노동자의 삶 파괴하는 손해배상 금지하라’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이종규 | 논설위원

쌍용자동차 노동자 김정욱씨는 최근 한 기자회견에서 “2009년 이후 하루하루가 벌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보이지 않는 감옥에서 살고 있다”고도 했다. 수십억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에 짓눌린 삶을 형벌에 비유한 것이다. 13년 전, 김씨를 포함한 쌍용차 노동자 67명은 사쪽과 경찰한테서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다.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불법’ 파업을 벌였다는 이유에서다.

우리나라에서 파업은 ‘웬만하면 불법’이다. 연관 검색어처럼 ‘파업’ 하면 으레 ‘불법’이란 말이 따라붙는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한국은 노동3권이 헌법에 보장돼 있는 나라인데 왜 파업에는 죄다 ‘불법’이라는 딱지가 붙을까?

주지하다시피, 우리 헌법 33조에는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고 규정돼 있다. 법률로 한계를 정하도록 한 재산권(23조)과 달리, 법률 유보 조항도 없다. 그런데 이 당연한 권리가 현실에서는 형해화되기 일쑤다. 노동 현장을 규율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동조합법) 때문이다.

노동조합법은 헌법이 규정한 노동3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이다. 이 법의 1조(목적)에 그렇게 적혀 있다. 그러나 ‘노동3권 보장’은 구두선에 그칠 뿐, 노동조합법엔 파업을 죄악시하는 조항들이 빼곡하다. ‘합법’ 파업으로 인정받으려면 촘촘한 ‘금지와 처벌의 지뢰밭’을 통과해야 한다.

물론 노동조합법엔 ‘면책 조항’이 있다. ‘사용자는 이 법에 의한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입은 경우에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에 대하여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3조)는 규정이다. 헌법이 쟁의행위를 핵심으로 하는 단체행동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쟁의행위는 ‘업무의 정상적인 운영을 저해하는 행위’(노동조합법 2조)이므로 파업 손해에 대한 면책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 면책 조항을 무력화하는 ‘요술 방망이’가 바로 ‘이 법에 의한’이라는 문구다. 법원은 이를 ‘이 법을 준수한’으로 해석한다. 문제는 ‘이 법’을 지키며 파업을 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이다. 노동자의 단체행동에 온갖 족쇄를 채워놓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법은 100여개의 조항으로 구성돼 있는데 대부분이 노동권을 제한하거나 부정하는 내용이고, 형벌 및 과태료 부과 항목이 40여개에 이른다.(‘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 투쟁과 손배가압류’ 국회 토론회 자료집)

노동조합법이 파업을 ‘웬만하면 불법’으로 몰고 가다 보니, 사용자들은 손해배상 소송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민법 조항이 소송의 근거다. 파업은 집단적으로 노무 제공을 거부하는 행위이므로 기업의 손해가 전제될 수밖에 없는데도 파업으로 인한 손실을 물어내라는 요구가 어느덧 사용자의 당연한 권리로 자리잡았다.

법원의 판단은 기울어진 운동장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다.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파업의 정당성 여부가 관건이 되는데, 법원은 쟁의행위의 주체·목적·절차·수단 중 어느 하나라도 정당하지 않으면 불법으로 판단해 배상 책임을 인정한다. 예컨대 노동자의 지위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는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파업에도 ‘목적’이 정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불법’ 딱지를 붙인다. 법원은 쟁의행위의 ‘주체’에 대해서도 ‘단체교섭의 주체’(근로계약 관계에 있는 노사)로 제한한다. 원청 사용자가 하청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지만, 원청을 상대로 하는 파업은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파업이 ‘웬만하면 불법’인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파업 한번 하려면 감옥 갈 각오를 해야 한다. 법원이 정당성이 없는 파업으로 판단하면 형법의 업무방해죄로 처벌받기 때문이다. 선진국으로 꼽히는 나라 가운데 파업을 했다고 형법으로 노동자를 처벌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법률에 한국처럼 형벌 조항을 두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고 한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권을 무력화하고 노동자의 삶을 파괴하는 무차별 손해배상 소송이 사회문제가 된 지도 어느덧 20년이 다 돼 간다. 다행히 최근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에 대한 470억원 손해배상 소송을 계기로, 파업이 ‘웬만하면 합법’인 사회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노동조합법 개정(노란봉투법) 운동이 그것이다. ‘손배 면책’의 대상이 되는 ‘정당한 쟁의행위’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 핵심이다. 더불어민주당도 정기국회 ‘22대 민생입법 과제’ 목록에 노란봉투법을 올렸다. ‘노동 후진국’이란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이 문제를 외면해선 안 된다.

이종규 논설위원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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