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지난 21일 독일 헤르네 슐로스 슈트륀케데 경기장에서 성소수자의 인권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펼쳐 들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특파원 칼럼] 노지원 | 베를린 특파원
11월 특파원 업무를 시작하며 월드컵을 눈앞에 둔 독일 사회 분위기를 유심히 봤다. 월드컵 네차례 우승국인 독일은 4년 전 한국에 2 대 0으로 패하고 16강행이 좌절됐다. 아무래도 이를 갈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좀처럼 월드컵 열기를 느끼기 어려웠다. 월드컵 시작 2주 전 칼리드 살만 카타르 월드컵대사가 독일 방송에서 동성애를 “정신적 손상”이라고 말하며 분위기는 더 가라앉았다. 독일 트위터에선 카타르월드컵 참여를 거부하는 해시태그(#BoycottQatar2022)가 퍼져나갔다. 스포츠 경기장에서는 카타르 이주노동자 사망과 관련한 촛불시위가 열렸다. 일부 펍은 경기 중계를 보이콧했다.
호엔하임대 설문조사에 따르면, 독일 시민 절반이 카타르월드컵을 보이콧하는 기업, 정치인을 지지한다. 3분의 2 이상이 총리의 경기 관람이 불필요하다고 여긴다. 독일 최대 성소수자(LGBTIQ+) 인권단체(LSVD)는 정부에 동성애를 법으로 금지하고 어기면 징역 7년형까지 선고될 수 있는 카타르에 ‘여행경보’를 내리라고 요구했다. 국제축구연맹(피파)까지 애초 독일 등 7개 대표팀이 착용하기로 한 ‘무지개 완장’을 금지하고 어기면 옐로카드를 줄 수 있다고 밝히자, 가라앉은 열기는 분노로 바뀌었다. 무지개 완장은 인종, 피부색, 성 정체성, 문화, 신념, 국적, 젠더, 나이 등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한다는 뜻이다.
“차별 반대는 독일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다. 독일 대표팀의 퍼포먼스는 무척 실망스럽다. 옐로카드를 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베를린에 사는
다니엘은 11월23일 일본과의 첫 경기 이야기가 나오자 열을 냈다. 일본에 져서 화가 난 게 아니라 대표팀이 “비겁했다”는 거다. 경기 전 독일 대표팀은 무지개 완장을 금지한 피파에 항의하는 뜻으로 손으로 입을 막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경기장을 찾은 낸시 페저 독일 내무장관은 보란 듯 팔뚝에 무지개 완장을 차고, 잔니 인판티노 피파 회장 옆에 앉았다. 하지만
다니엘은 “이란 선수들이 국가를 부르지 않고 침묵한 것을 보라”며 “차라리 다른 7개 팀과 연대해 경기를 보이콧했다면 피파도 어쩌지 못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독일이 ‘차별 반대’라는 가치를 얼마나 무겁게 여기는지는 정책에도 나타난다. 독일은 2006년 차별금지법(일반평등법)을 제정하고, 2017년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지난해 출범한 신호등 연정은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성소수자 위원회’를 만들었고, 11월18일 ‘퀴어 리빙’(퀴어 레벤)이라는 국가행동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성 정체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자기결정법’, 반폭력 프로그램 도입 등이 담겼다. 차별에 반대하는 시민 동력을 바탕으로 제도적 장치가 두꺼워지고 있다.
‘독일은 왜 카타르월드컵에 냉소적인가’에서 출발한 질문은 ‘한국은 언제쯤?’이란 궁금증으로 번졌다. 2007년 노무현 정부가 차별금지법을 처음 발의한 뒤 15년이 흘렀다. 역대 국회에서 문턱을 넘지 못한 법안은 21대 국회에도 여전히 계류 중이다. 11월15일 더불어민주당이 우선 처리 법안에 차별금지법을 넣었다고 한다. 4월 국가인권위원회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 67.2%가 차별금지법 도입 필요성에 동의했다. 한국 시민들도 이젠 준비가 돼 있는 듯하다.
z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