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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임신중지’, 언제까지 사소한 문제? [한겨레 프리즘]

등록 2023-09-26 18:35수정 2023-09-27 02:38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가 지난 7월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임신중지약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하고 신속하게 도입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제공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가 지난 7월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가 임신중지약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하고 신속하게 도입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제공

[한겨레 프리즘] 박현정 | 인구·복지팀장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드립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7년 9월30일 청와대 누리집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와 23만여명의 지지를 받은 글의 제목이다. 그 이후 형법상 낙태죄는 헌법재판소에 의해 2021년 1월1일부터 효력을 잃었다. 하지만 프랑스·영국 등 96개국에서 합법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자연유산 유도약은 국내에선 여전히 불법이다.

최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제1법안심사소위(위원장 고영인) 심사 안건으로 약물을 사용한 임신중지(중절) 허용, 임신중지 정보 제공과 상담 절차 등을 명시한 모자보건법 개정안 7건이 한데 묶여 올라왔다. 낙태죄 효력이 사라질 즈음인 2020년 10월~2021년 1월 당시 여야 의원들과 정부가 발의한 법안이 3년가량 묵혀지다 복지위 차원의 논의 첫발을 뗀 셈이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임신중지 여성과 의료진을 처벌하는 형법의 낙태죄 조항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결정했다. 모자보건법이 정한 제한적 사유 이외에 임신기간 전체에 걸쳐 사회경제적 갈등 상황에도 출산을 강제하는 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도 짚었다. 헌재는 2020년 12월31일까지 형법·모자보건법 등을 손보라고 주문했지만, 정부안 마련은 더뎠고 국회 논의는 지지부진했다. 그 결과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하지 못하는 제도적 공백이 이어지고 있다. 오랜 기간 여성들이 임신중지에 필요한 정보를 음성적으로 수집하고, 의료기관 마음대로 책정하는 수술비를 부담해온 상황은 헌재 결정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임신중단 의료접근 실태와 정책과제’, 2021) 일부 여성은 인터넷을 통해 임신중지가 가능하다는 약물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사기를 당하거나 부작용을 겪기도 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발표한 ‘2021년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만 15~49살 여성 8500명 온라인 설문) 결과, 임신을 경험한 3519명 가운데 606명(17.2%)이 임신중지를 한 적이 있다. ‘학업·직장 등 사회 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35.5%)는 우려와 ‘고용 불안정, 소득이 낮아서 등 경제 사정’(34.0%) 같은 현실이 두루 얽힌 결과다. 국내에선 불법인 약물을 사용해 임신중지를 했다는 이들도 7.7%(약물 사용 뒤 수술 5.4% 포함)에 달했다.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는 피임, 다양한 사유로 이뤄지는 임신중지, 그 과정에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은 정부에는 여전히 사소한 문제다. 20일 복지위 제1법안소위 회의록을 보면, 보건복지부는 형법에서 임신중지 허용 요건을 먼저 정리한 뒤 원치 않는 임신 예방과 안전한 임신중지 환경을 조성하는 모자보건법 개정 논의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국민의힘 소속 위원들 주장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형법 개정 소관 상임위인 법제사법위원회에선 낙태죄 관련 개정 논의가 시작되지도 않았다. 임신중지 여성 처벌 규정을 완전히 없애자는 주장(권인숙·이은주·박주민 의원안)과 일정 요건을 둬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정부안, 조해진·서정숙 의원안)은 첨예하게 맞서 조정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날 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 위원들은 형법과 상관없이 모자보건법 개정을 먼저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현행법상 임신중절 부분엔 약물 시술 규정이 없다. 약물 시술과 사회심리적 상담 지원 근거를 먼저 마련하고, 법사위에서 형법 개정안이 논의되면 그때 또 모자보건법을 개정하자.”(남인순) “모자보건법에서 다룰 수 있는 안을 만들어 저쪽(법사위)에 던져 형법 개정을 촉구하며 상호 작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영인)

국회 복지위는 11월 법안심사소위에서 모자보건법 개정안 심사를 이어가기로 했다. 공회전을 거듭하고 있는 국회가 지금이라도 여성의 건강권과 안전한 임신중지 보장을 중심에 놓고 논의에 속도를 내길 바랄 뿐이다.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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