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택 논설위원
공교롭게도 1주일 사이에 잇달아 무죄가 내려진 두 사건. 30년의 시차가 있지만 모두 경찰이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고, 최근 화젯거리가 되고 있는 것까지 닮았다. 그러나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된 부림사건은 재심을 통해 겨우 진실이 드러났지만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선거법 위반 사건은 진실이 실종될 위기에 있다.
김 전 청장에 대한 무죄 판결이 옳았는지를 놓고 평가는 엇갈린다. 한쪽에선 증거가 부족했으니 ‘애매할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 하라는 형사법의 대원칙에 따른 소신 판결이라며 박수를 보낸다. 경찰의 ‘허위 발표’ 전후 민감한 시기에 이뤄진 여당 실세와 국정원 및 경찰 간부들 사이의 통화기록조차 법정에 제출되지 않았으니 그렇게 볼 소지도 없지 않다.
그럼에도 판결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목에 가시 걸린 듯 켕기는 대목이 있다. 108쪽짜리 판결문의 주요 쟁점을 관통하는 논리는, 경찰관들의 진술은 구체적이고 서로 일치하니 믿을 만하나 이와 어긋나는 권은희 과장의 진술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쟁점을 15개나 뽑아 일일이 따지면서 이상하게도 사건의 핵심인 경찰의 ‘허위 발표’에 대한 직접적 판단은 빠져 있다. 대신 이 부분은 별도 항목으로 빼내서 “시기와 내용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나…”라고 애매하게 언급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바로 대선 3일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왜 그처럼 진실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발표를 강행했는지가 김 전 청장의 선거 개입 ‘의도’를 가려줄 결정적 대목이다.
그래서 이런 의구심이 생긴다. 경찰 발표로 153만표 이상 뒤집혔을 것이라는 여론조사가 말하듯, 허위 발표가 유죄면 현직 대통령의 정통성에 결정적 타격이 가해질 것을 혹시 재판부의 마음 깊은 곳 잠재의식 속에서라도 우려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무죄의 핑계를 찾다보니, 말을 맞추고 들어온 경찰들의 완벽한 논리에 쉽게 눈길이 끌렸고…. 그러다 보니 권 과장의 진술 신빙성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러나 권 과장과 무관한 허위 발표 혐의엔 신빙성 논리를 들이댈 수 없으니 아예 쟁점에서 빼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모두 추정이다. 그러나 경찰관들 진술을 믿는다면서 판결문이 전개한 논리를 보면 이 모든 게 현실성 없는 공상일 뿐이라고 치부해버리기도 어렵다. “개인적 성향 등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경찰관들이, 시차를 두고 수사받고 법정증언을 하면서, 서로 모의해 말을 맞췄을 리 없다”는 게 이들의 진술을 믿을 수밖에 없는 근거라니, 너무 허술하다.
그뿐 아니다. 국정원 직원 김하영씨가 ‘대선에서 문재인이 당선될 수 없는 이유’에 찬성 클릭하고 이정희 후보를 비판하는 글을 쓴 사실 등 선거법 위반의 단서를 포착해놓고도, 담당 경찰관은 보통 증거분석보고서에 쓰지 않는 ‘혐의 없음’이란 표현을 넣었는데도 재판부는 문장을 매끄럽게 하려던 것일 뿐이라고 믿어줬다. 그 표현에 대한 이견으로 일부 경찰들이 서명을 거부했던 것도 오해에서 빚어진 해프닝이고, 분석 결과를 5일이나 묵힌 것도 “내부 논의가 필요하고 바쁘다 보니” 그런 거라고 너그럽게 봐줬다.
영화 <변호인> 속 고문 장면을 극구 부인한 당시 수사검사들의 속내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경찰에 연행된 지 한참 지나서야 작성된 자술서만 봐도 최소한 ‘불법 감금’이 있었음은 알았을 것이다. 그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결국 부림 사건 조작의 진실은 33년 만에 드러났다. 마침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진실도 23년 만에 빛을 봤다. 그러나 지체된 진실은 정의가 아니다. 김용판 사건의 진실만은 그런 일이 없길 기대한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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