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의 민주당 경선 승리는 그의 말대로 ‘역사적’이다. 여성으로선 미국 주요 정당 대통령후보직을 거머쥔 첫 사례다. 그가 11월 대선에서 이기면 남편에 이어 백악관에 입성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2008년 경선에서 버락 오바마에게 아깝게 패한 뒤 8년 만의 권토중래이기도 하다. 미국 언론들이 7일 밤(현지시각) 나온 캘리포니아 경선 결과를 높게 평가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힐러리의 승리는 세계적 통신사 <에이피>(AP)의 앞선 보도로 빛이 바랬다. 캘리포니아 경선 전야에 <에이피>는 왜 힐러리의 ‘후보 확정’을 서둘러 보도한 것일까.
<에이피>는 캘리포니아 경선 투표(7일)가 시작되기도 전인 6일 “자체 조사 결과 클린턴이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 2383명을 이미 확보했다. 이제 클린턴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예정자’(presumptive nominee)로 부르겠다”고 보도했다. 캘리포니아는 미국 50개주 가운데 대의원이 가장 많이 걸린 주다. 여론조사에선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만약 샌더스가 캘리포니아에서 이긴다면 실낱같긴 하지만 역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런 민감한 상황에 <에이피>는 투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보도를 도대체 왜 했는가, 그리고 그건 언론으로서 옳은 태도인가, 숱한 논란과 비판이 쏟아졌다.
캐슬린 캐럴 <에이피> 편집인은 “우리는 오랫동안 민주당 슈퍼대의원들의 지지 의향을 추적해왔고, 힐러리를 지지하는 대의원 수가 6일 과반을 넘었다. 이건 뉴스고, 뉴스를 보도하는 건 우리 임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슈퍼대의원은 언제든 마음을 바꿀 수 있다. 중요한 캘리포니아 경선 직전에 굳이 이런 보도를 한 건 충분히 의혹을 살 만했다. 샌더스 지지자들은 “민주당 주류와 주류 언론(에이피)이 힐러리 승리를 기정사실로 하려고 공작을 했다”고 맹비난했다. 비슷한 전례도 있다.
힐러리가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그의 측근이 기자에게 ‘보도 협조’를 요청하는 이메일을 보냈는데, 그 내용이 올해 초 공개됐다. 기자가 힐러리 장관의 외교협회(CFR) 연설문을 미리 달라고 하자, 힐러리 측근이 ‘세 가지 약속을 지키면 미리 주겠다’고 제안하는 내용이다. ‘첫째, 기사에 ‘강인하다’는 표현을 쓸 것. 둘째, 클린턴 장관 앞줄에 국무부 특사들 자리를 배치한 건 우연이 아님을 언급할 것. 셋째, 이 메일을 받았다는 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 것’ 등이었다. 기자는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고, 실제 기사엔 이 측근의 요구가 모두 들어갔다.
<에이피> 보도는 성공했다. <엔비시>(NBC) <에이비시>(ABC) 등 미국 주요 방송이 앞다퉈 힐러리의 후보 확정을 속보로 내보냈고, 캘리포니아 투표가 실시되는 7일 아침(현지시각) <뉴욕 타임스> 1면 헤드라인 제목은 ‘힐러리 역사적 승리에 도달하다, <에이피> 보도’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8일 아침(한국시각) 모든 신문 1면엔 ‘힐러리, 민주당 대선후보 확정’ 기사가 실렸다.
문제는 이 보도가 힐러리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점이다. 힐러리는 캘리포니아 경선에서 승리한 뒤 “오늘 우리는 미국에서 가장 높고 단단한 유리천장을 깼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의 승리는 ‘도전’보다 ‘기득권’의 상징으로 유권자들에게 다가왔다. 힐러리는 여성이지만, 민주당의 가장 확실한 ‘주류’고 ‘워싱턴 인사이더’인 탓이다. 힐러리는 어떻게 ‘도전자’와 ‘아웃사이더’의 열정을 되살릴 수 있을까. <에이피> 보도가 그에게 남긴 절체절명의 숙제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박찬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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