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는 영국 왕 찰스 2세가 청교도혁명 때 아버지 찰스 1세 처형에 찬성한 재판관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특정인들에게 불이익을 가하거나 경계할 목적으로 만든 명단을 통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미국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졌다는 공산주의자 명단이나 박근혜 정부가 만든 문화예술계 등의 지원배제자 명단이 한 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의 ‘법원판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은 25일 보고서에서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법관들의 성향·동향·재산관계 등을 파악한 파일들이 존재’했다고 밝혔다. 다만 ‘리스트를 작성해 조직적 체계적으로 인사상 불이익을 부과했음을 인정할 만한 자료는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뒷부분을 빌미로 일부 언론은 ‘블랙리스트는 없었다’며 이를 ‘괴담’으로 매도했다.
그러나 특조단 보고서 별지엔 ‘2016 국제인권법연구회 운영위원회’ 간부들 이름 옆에 함께 활동하는 판사들로 보이는 ‘꾸리미’를 적어넣은 리스트가 있다. ‘인사모(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 회원’을 ‘최초 주도’ ‘동조그룹’ 등 네 그룹으로 분류하고 개인별로 ‘사법행정 책임자들에 대해 불만이 많다’는 등 특징을 적은 리스트도 있다. 앞서 2차 조사위는 ‘사법행정위원 후보자 추천’ 명단을 빨간색(1순위), 청색(2순위), 흑색(3순위)으로 나눠 성향과 평판·행적 등을 상세히 적은 리스트를 공개했다. 법원장들에게 인사에 참고하라며 전달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양승태 대법원’은 인사모 핵심회원에게 인사·연수 등에서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검토했다. 사법행정에 반대하는 판사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리스트를 관리하며, 언론사를 방문해 협조 요청한 것으로 보이는 문건들도 나왔다.
그런데도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한다면 ‘영구 없다’ 이후 최고의 코미디 아닐까.
김이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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