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1%%]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라이프>는 의사 집단의 명예의식을 중요한 변수로 다룬다.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종합병원 재단을 재벌그룹이 인수해 회장 측근을 병원 사장에 앉힌다. 의료 행위를 보통의 영업 행위와 구별해서 보는 의사들의 직업의식과 기업의 이윤논리가 충돌하기 시작한다.

사장이 응급의학과, 소아과 등 적자가 심한 과들을 지방으로 보내려고 하자 의사들은 파업을 결의한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이, 그것도 종합병원이 흑자 나는 과만 남기고 나머지를 없애면 안 될 것 같다. 의사들의 파업에 명분이 실린다.

사장은 전에 없던 병원 업무감사를 벌인다. 병원 구조조정실에서 병원 내 자료와 컴퓨터 파일을 다 가져가려 하자 의사들은 당혹스러워한다. 한 번도 외부 사람에게 열람을 허용한 적이 없는 것들이다. 그 안엔 제대로 정리 안 된 것, 사사로운 것, 사소한 잘못이 다 들어 있을 거다. 아니 그보다 더 큰, 범죄에 해당하는 어떤 무엇이 있을지 자기들조차도 모른다. 어떤 과는 구조조정실에서 가져가기 전에 자료를 지우고 삭제하고, 어떤 과는 환자의 개인 비밀이 담겨 있다며 자료 제출을 거부한다.

이 대목에서 지금 한국의 판사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알다시피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사법농단 사태로 대법원이 검찰의 수사를 받는 사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한 번도 알려진 적 없는, 알려질 거라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내부 사정들이 밖으로 드러날 처지에 놓이자 당혹스러워하는 판사들의 모습이 드라마 속 의사와 닮았다. 드라마 속 의사들의 입장에선, 웬 재벌의 개(사장)가 와서 숭고한 의료 행위를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키려고 한다고 볼 거다. 판사들의 입장에선 웬 권력의 개(검찰)가 와서 숭고한 재판 행위의 자료들을 다 가져가려 한다고 볼지 모른다.

드라마 속 업무감사에선, 암센터의 수술 도중 약을 잘못 투여해 환자가 숨지는, 과실치사에 해당하는 범죄행위가 벌어졌는데도 의사들의 공모 혹은 묵인 아래 병상 악화로 숨진 걸로 덮어버린 일이 발각된다. 의사 사회의 약점을 잡은 사장은 이런 사실을 외부에 알린다. 의사들이 주도한 파업에 대한 여론의 지지도 떨어진다. 하지만 이런저런 계산 아래 사장은 파업의 원인이 됐던 일부 과의 지방 이전 계획을 철회한다. 드라마의 사장과 한국 검찰을 비교하는 건 당연히 무리다. 말하려는 건 이 드라마에서도 드러나는 싸움의 룰이다. 명분을 얻고 명예를 지키려면 정정당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서울중앙지법 영장 전담 판사들이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검찰의 압수수색영장을 심사하는 걸 보면 거의 파업 수준이다. 압수수색영장은 발부율이 90%를 넘는다는데, 지난 두 달 사이 이 사태와 관련한 압수수색영장은 기각률이 90%를 넘는다. 기각 사유도 궁핍해서 언론이 계속 법원을 비난하는데도 판사 사회가 조용하다. 판사들의 명예에 대한 집단적 위기감, 집단 방어의식 같은 게 작용하지 않고선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의사든 판사든 업무의 특수성과 독자성이 존중받고 지켜져야 하는, 그래야만 의미와 가치가 사는 집단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특수성과 독자성을 존중받는 것과, 자기 치부를 감추거나 감출 수 있는 장치를 고집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일이다. 전자가 훼손됨을 무릅쓰고라도 후자를 없애야 하는 게 원칙이다. 지금처럼 법원의 치부가 드러나고 체면이 바닥을 칠 때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야만 명예를 지킬 수 있다. 명예가 사라진 사법부가 사법부일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