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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대법관’ 대 ‘대법원 판사’/ 김이택

등록 2018-12-05 18:22수정 2018-12-05 19:16

박병대(왼쪽), 고영한 전 대법관.                                                <한겨레> 자료사진
박병대(왼쪽), 고영한 전 대법관. <한겨레> 자료사진

1981년 4월15일 임기를 마친 이영섭 대법원장은 퇴임식 직전 쓴 퇴임사에 사법부(司法府)를 ‘司法部’라고 적었다. 3부의 한자리를 차지해야 할 사법부가 일개 행정부처로 전락했다는 신랄한 자조였다. 앞서 쿠데타와 학살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취임 인사차 찾아간 이 대법원장에게 김재규 내란음모 사건을 거론하면서 ‘국사범에게 소수의견이 가당키나 하냐’고 쏘아붙였다. 대법원을 날려버리자는 장군들을 자기가 말렸다고 겁박했다. 다른 자리에선 “그때 대법원 판사들 집을 다 알아두었다”고 협박했고, 실제 소수의견을 주도한 양병호 대법원 판사는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끌려가 고문까지 당했다.(한홍구 <사법부> 참조) 사법부 전체에 ‘회한과 오욕’의 시대였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대법관의 명칭을 대법원 판사로 바꿨다. 판사이나 대법원에 근무할 뿐이란 뜻이니 격을 낮춘 셈이다. 1971년 6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군인 등의 국가배상책임을 면제한 국가배상법 조항을 위헌 판결하자 이듬해 10월 유신헌법에선 대법원의 위헌 법률 심판권마저 빼앗아 헌법위원회에 넘겨버렸다.

안기부 등 정보기관원들이 법원장실까지 맘대로 들락거리며 판결에 간섭하던 군사독재 시절이었으니 말 그대로 사법부의 암흑기였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이듬해 헌법이 개정되면서 ‘대법관’ 명칭도 복권됐으니 그 이름에 우리 민주주의 역사가 담긴 셈이다.

국민들이 민주화 투쟁으로 ‘대법관’의 위상을 찾아줬으나 그 이름을 다시 추락시킨 건 그들 자신이었다. 촛불시위 사건 재판에 부당하게 개입한 신영철 대법관은 끝까지 버티며 임기를 채웠으나 오염된 대법원은 국민적 신뢰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 사건을 엄정하게 처리했다면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태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박근혜 정부 시절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박병대, 고영한 두 전직 대법관이 6일 사법농단을 주도한 혐의로 후배 법관들 앞에서 구속영장 심사를 받는다. 이런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법원 전체가 “사법부의 독립을 갉아먹는 가장 무서운 적은 사법부 안에 있다”는 한홍구 교수의 지적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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