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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사법 70년, 영욕의 대법원장들 / 김이택

등록 2019-01-23 18:15수정 2019-01-23 22:26

1948년 정부 출범 직전 이승만 대통령은 서아무개 변호사를 대법원장에 임명하려 했다. 그런데 8월5일 열린 첫 각의에서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단체 경력 탓에 “일제 때 충성하던 사람”이라며 반발들이 심했다. 결국 이인 법무장관이 대안으로 김병로 변호사를 추천하고 참석자들이 동의하자 이 대통령도 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김규식 사람”이라며 내내 마뜩잖아한 대통령에 맞서 김 대법원장은 끝까지 사법부 독립을 지켜냈다. 1957년 후임 인사도 순탄치 않았다. 법에 따라 대법원장과 대법관, 각 고등법원장들로 꾸려진 법관회의가 김동현 전 대법관을 제청했으나 이 대통령이 거부했다. 대신 법관회의에 친서를 보내 자유당 경북도당 위원장인 이아무개씨 제청을 요구했다. 노골적인 정파적 인선에 이번엔 법관회의가 거부했다. 결국 이듬해 1월 법관회의가 법무장관 출신의 조용순 변호사를 선출함으로써 겨우 봉합됐다.(한인섭, <가인 김병로>)

박정희 정권 때는 3명의 대법원장 중 5·6대에 걸쳐 10년2개월의 역대 최장수 기록을 남긴 민복기 대법원장이 단연 도드라진다. 일제 때 판사를 하다 해방 뒤 서울지검 검사장, 법무장관을 거쳐 1968년 대법원장이 됐다. 1978년 12월까지 그의 재임 기간은 인혁당 ‘사법살인’이 상징하듯 사법부의 암흑기였다. 그의 아버지 민병석은 ‘한일합방’ 조약에 협력해 자작 작위를 받았고, 형 홍기도 이를 물려받는 등 대표적인 친일 가문으로 꼽힌다.

전두환 정권에서 5년간 대법원장을 지낸 유태흥은 ‘이법회’ 출신이다. 조선변호사시험 당일 일제의 항복선언으로 필기시험을 마치지 못하자 응시자 200여명이 단체를 꾸려 합격증을 받아냈다. 이 합격증으로 2회 변호사시험에 응시해 구술면접만으로 변호사 자격을 얻고 38살에 판사가 됐다. 1981년 박철언 청와대 정무비서관에게 “사법부도 정치적·공안적 사건에선 정부에 협력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고 대법원장에 올랐다. 소신 판결 판사들을 좌천시켰다가 야당에 의해 탄핵소추 발의를 당한 전무후무한 불명예의 주인공이기도 하다.(김두식, <법률가들>)

정부 수립 이래 70년간 14명의 대법원장 가운데는 김병로·이일규 등 사법부 독립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례도 있으나 독재정권을 법으로 합리화해준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구속영장까지 청구된 것은 양승태 대법원장이 처음이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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