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팀장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지난해 9월 서울중앙지법에 한 장짜리 답변서를 냈다. ‘위 사건에 관하여 피고 양승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답변 취지.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이유. 대법원 판결이 선고된 사실 외에는 원고 주장 사실을 모두 부인합니다. 원고 주장의 법리 또한 아무 근거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고의 청구는 기각되어야 합니다. 피고 양승태.’ 2015년 대법원은 ‘변호사 성공보수’가 민법상 사회질서에 반한다며 무효로 판결했다. 검찰은 상고법원에 반대하는 변호사단체 압박 방안의 하나로 양승태 대법원이 성공보수 문제를 검토했다고 의심한다. 대법원 판결 때문에 성공보수를 못 받았다고 주장하는 한 변호사가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양 전 대법원장은 대리인을 세우지 않고 직접 쓴 세 줄짜리 ‘명쾌한’ 답변서를 판사에게 제출했다. 반년을 끈 재판은 변론기일 한번 잡히지 못했다. 그사이 양 전 대법원장은 구속됐다.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는 것 말고는 모두 부인한다, 아무 근거 없다, 그래서 기각돼야 한다. 1.5단에서 2단쯤 되는 이 논법은 어쩐지 익숙하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해 6월부터 같은 말을 계속 타전해왔다. 놀이터 기자회견에서, 민사소송 답변서에서, 대법원 담벼락 앞에서, 검사의 책상에서, 세상 모든 기록을 어깨에 짊어진 듯했을 후배 법관 앞에서. 누군가 응답해주기를 기다리며 그의 2단 논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의 답변서가 계속 신경 쓰였던 것은 불친절한 판결문처럼 보이는 그 간명함 때문이 아니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민사소송 답변서 맨 아래에 도장을 찍었다. 목도장, 아니 막도장이라는 입말이 더 익숙한 바로 그 막도장이었다. 5천원이면 막 파주는 막도장은 인주가 잘 묻지 않았나 보다. 한글로 인각된 양 승 태 석자 가운데 ‘양’의 초성이 흐릿했다. ‘승’의 삐침 획은 부자연스럽게 날카로웠다. 42년 판사로 살았던 그가 이런 막도장을 언제, 왜 팠을까 싶었다. 그가 대법원장 시절 썼던 도장을 떠올리며 든 생각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 맨 끝에는 재판장인 대법원장을 시작으로 대법관 전원의 서명과 함께 도장이 찍힌다. 양 전 대법원장은 다른 대법관들과 달랐다. 만년필로 가볍게 흘려쓰지 않았다. 붓펜으로 쓴 것이 분명한 양 승 태 석자가 한글 현판처럼 굵고 힘이 있었다. 그 옆에는 막도장 3개쯤 합친 크기의 도장이 요철이 느껴질 만큼 묵직하게 판결문을 눌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라는 무게를 느껴보라는 듯했다. 이름 석자 외에 첨자도 했다. 다른 대법관들은 이름 뒤에 장(章) 또는 인(印)을 더하거나 그냥 이름만 들어간 도장을 썼다. 양 전 대법원장은 신(信)을 첨자했다. ‘梁承泰信’이 도장의 둥근 테두리까지 꽉 찼다. 첨자로 ‘信’을 쓰는 사람은 많다. 양 전 대법원장 역시 성명과 사주, 음양오행을 따진 뒤 이름자 획수를 보충해주는 길한 첨자로 ‘信’을 택한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대법원장 도장에 ‘믿을 신’이 함께하다니, 누가 그 판단을 거스를 수 있었을까. 판결문을 받아든 누군가에게는 대법원장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누군가에게는 억울할지언정 ‘나의 판결을 거스르지 말라’는 강권의 주홍글씨로 다가왔을 법하다. 대법관 출신 전관변호사의 ‘도장값’은 수천만원을 호가한다고 한다. 막도장은 주로 위조, 사기, 조작, 손해배상 등과 짝을 이뤄 판결문에 등장한다.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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