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개 내용과 사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보공개 청구에 대한 대법원의 답변은 이렇게 시작했다. 지난달 9일 김명수 대법원장은 ‘국민 여러분께 올리는 말씀’을 발표하면서 사법농단에 연루된 현직 판사를 추가로 징계 청구했다. 그 글에 따르면 검찰이 ‘문제가 있다’고 본 현직 판사 66명(기소된 현직 판사 8명 포함) 중 징계시효(3년)가 지난 판사가 32명이라 했다. 징계가 가능한 나머지 34명 중 대법원이 보기에도 문제가 있어서 법관징계위원회 심사 대상으로 올렸다는 판사는 고작 10명이었다.
애초 검찰이 통보한 명단에 오른 이들은 누구이고, 그중 시간의 은혜를 입은 이들은 누구인지, 징계 시효가 지나지 않은 이들 중에서 어떤 기준에 의해 10명이 추려졌는지, 설명은 한 줄도 없었다. 일단 그 10명이라도 알아보자 싶은 마음에 노트를 펼쳤다. 대법원이 알려준 정보라곤 고등법원 부장판사 3명, 지방법원 부장판사 7명이라는 것과 그중 5명은 기소돼 재판받는 상태라는 것. 66명, 32명, 34명, 10명, 8명, 5명. 학창 시절 수학시간에 배웠던 벤다이어그램을 끄적거렸다. 여집합과 교집합…. 무수한 동그라미를 그려보다가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은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 순전한 궁금증으로 정보공개 청구까지 해봤지만 그 답변은 다르지 않았다.
대법원이 징계 청구 ‘숫자’를 발표한 날, 대법원에 기대한 것은 단답형 답변이 아니라 서술형 답변이었다. 명단에 오르내린 개개인의 이름은 밝히기 어렵다 하더라도, 대법원에 궁금한 점이 많았다. 법관 징계시효는 사유가 있는 날로부터 3년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비위 행위의 시효는 하나둘 만료되고 있어 대법원이 하루빨리 징계에 착수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다. 그러나 “대법원이 오래 뜸을 들이면서 상당수 판사의 징계시효가 지나버렸다”는 비판에 대한 해명이나 반박은 없었다.
글자 수로 500자가 채 넘지 않는 정보공개 청구 답변도 비슷했다. 일단 기다리라는 게 요지였다. “법관징계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징계처분이 있게 되면 해당 법관의 성명과 비위 행위가 관보에 게재됩니다. 그 전에 미리 성명 및 소속이 공개될 경우 그 자체만으로 징계 피청구인의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습니다.” 사법농단 관련 비위 행위가 사생활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법관징계위원회 판단을 거쳐 징계 대상이 최종 확정되면 어차피 대법원 관보에 그 이름과 함께, 소속, 징계 사유가 기재될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한 판사는 “대법원이 어떻게 이런 판단을 내렸는지 정보가 없으니 평가도 어렵다. 숫자만 있으니 ‘많다’ ‘적다’ 이야기하기도 난감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국민 입장에서는 ‘내가 사법농단 연루 판사한테 재판받는 것은 아닌가’ ‘징계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재판 업무를 계속해도 문제없다는 것인가’ 궁금할 수 있다. ‘국민 여러분께 올리는 말씀’이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때로는 어떤 행위를 문제라고 본 것보다, 어떤 행위는 문제가 아니라고 본 것이 더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법원은 그런 판단의 실마리조차 남기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사법농단 사건으로 기소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현 고등법원 부장판사) 쪽은 자신의 형사재판에서 오는 24일 법관징계위원회에 출석하기로 돼 있다고 스스로 밝혔다. 이 전 실장 등을 비롯해 10명의 징계 심의가 마무리되면, 사법농단 관련자에 대한 대법원의 자체적인 감사나 징계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최종 징계 명단이 발표될 당일 아침, 관보에서 그 이름과 징계 사유를 본다 한들, 지난해 징계받은 8명의 법관에 숫자 하나 더해지는 것 외에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한솔
법조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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