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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핵과 사다리 걷어차기 / 고명섭

등록 2019-06-25 14:59수정 2019-06-25 19:0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월28일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호텔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EPA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월28일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호텔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EPA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쓴 <논리철학 논고>는 20세기 언어분석철학의 문을 연 기념비적 저작이다. 간략한 명제들의 집합체인 이 조그만 책을 마무리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걷어차버려야 한다.” 이 책의 명제들은 사다리의 난간이며 이 난간을 딛고 올라선 사람은 결국 이 책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므로 책을 던져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심혈을 기울여 책을 써놓고 결국엔 그 책을 던져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기이한 역설을 내장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이 책에서 참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거기에 쓰인 명제들이 아니었다. 명제들을 쌓아 올려 우리 언어와 세계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이 그 책을 쓴 이유였지만, 동시에 명제들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었다. 이 책을 출간한 뒤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산골로 들어가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됐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논리철학 논고>라는 사다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다리 너머에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 걷어차기’는 북한 핵을 이해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 2016년 이후 맹렬하게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 몰두하던 북한은 2017년 11월 핵무력을 완성했다고 선언했다. 그러고 나서 태도를 확 바꿔 미국과 대화에 나섰다. 지난해 4월에는 핵·경제 병진 노선을 버리고 경제건설 총력집중 노선을 채택했다. 이 급박한 흐름은 핵무기 자체가 북한의 진정한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김정은 위원장은 기회가 날 때마다 체제 안전이 확실히 보장만 된다면 핵을 포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평양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내 아이들이 핵을 등에 지고 평생 살아가길 원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땐 “핵 없이도 안전하게 살 수 있다면 우리가 왜 제재를 무릅쓰고 힘들게 핵을 갖고 있겠느냐”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털어놓았다. 북한의 진정한 관심사가 체제 안전과 경제건설에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김정은 위원장에게 핵무기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나면 버려야 할 사다리 같은 것이다. 북한이 2017년 쫓기듯 핵무력 완성을 선포한 것은 부실한 대로 사다리를 다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궁극의 목표가 사다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정도만 되면 난간이 탄탄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이 조급한 발표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사다리를 걷어차려면 사다리를 버리고 올라설 또 다른 발판이 있어야 한다. 그 발판이 마련되지 않는 한 사다리에서 내릴 수 없고 사다리를 버릴 수 없다. 북한이 원하는 발판이 바로 안전 보장이다. 북한이 체제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미국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평화협정을 맺고 국교를 정상화해야 한다. 북한은 평화협정과 북-미 수교라는 안전판이 마련됐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핵이라는 사다리를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사다리를 버릴 때를 기다리며 사다리를 붙들고 있는 것이 지금 북한이 처한 상황이다.

북-미 비핵화 협상이 원만히 이뤄지려면 이 모순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미국은 오랫동안 북한을 무시했고 북한에 대해 깊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북한이 무엇을 원하는지, 왜 핵 개발에 뛰어들었는지를 역지사지의 태도로 따져보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이런 말도 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또한 말할 수 없다.” 생각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면 대화로 풀 수 없다. 그것이 지난 수십년 동안 북-미 협상이 원점에서 맴돈 이유다. 북한이 핵을 버리고 다른 것으로 갈아탈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체제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발전에 몰두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 한국을 방문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북한의 마음을 돌려세울 결단의 메시지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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