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월28일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호텔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EPA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쓴 <논리철학 논고>는 20세기 언어분석철학의 문을 연 기념비적 저작이다. 간략한 명제들의 집합체인 이 조그만 책을 마무리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걷어차버려야 한다.” 이 책의 명제들은 사다리의 난간이며 이 난간을 딛고 올라선 사람은 결국 이 책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므로 책을 던져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심혈을 기울여 책을 써놓고 결국엔 그 책을 던져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기이한 역설을 내장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이 이 책에서 참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거기에 쓰인 명제들이 아니었다. 명제들을 쌓아 올려 우리 언어와 세계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이 그 책을 쓴 이유였지만, 동시에 명제들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이었다. 이 책을 출간한 뒤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산골로 들어가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됐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논리철학 논고>라는 사다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다리 너머에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 걷어차기’는 북한 핵을 이해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 2016년 이후 맹렬하게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 몰두하던 북한은 2017년 11월 핵무력을 완성했다고 선언했다. 그러고 나서 태도를 확 바꿔 미국과 대화에 나섰다. 지난해 4월에는 핵·경제 병진 노선을 버리고 경제건설 총력집중 노선을 채택했다. 이 급박한 흐름은 핵무기 자체가 북한의 진정한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김정은 위원장은 기회가 날 때마다 체제 안전이 확실히 보장만 된다면 핵을 포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평양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내 아이들이 핵을 등에 지고 평생 살아가길 원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땐 “핵 없이도 안전하게 살 수 있다면 우리가 왜 제재를 무릅쓰고 힘들게 핵을 갖고 있겠느냐”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털어놓았다. 북한의 진정한 관심사가 체제 안전과 경제건설에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김정은 위원장에게 핵무기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나면 버려야 할 사다리 같은 것이다. 북한이 2017년 쫓기듯 핵무력 완성을 선포한 것은 부실한 대로 사다리를 다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궁극의 목표가 사다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정도만 되면 난간이 탄탄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이 조급한 발표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사다리를 걷어차려면 사다리를 버리고 올라설 또 다른 발판이 있어야 한다. 그 발판이 마련되지 않는 한 사다리에서 내릴 수 없고 사다리를 버릴 수 없다. 북한이 원하는 발판이 바로 안전 보장이다. 북한이 체제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미국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려면 평화협정을 맺고 국교를 정상화해야 한다. 북한은 평화협정과 북-미 수교라는 안전판이 마련됐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핵이라는 사다리를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사다리를 버릴 때를 기다리며 사다리를 붙들고 있는 것이 지금 북한이 처한 상황이다.
북-미 비핵화 협상이 원만히 이뤄지려면 이 모순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미국은 오랫동안 북한을 무시했고 북한에 대해 깊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북한이 무엇을 원하는지, 왜 핵 개발에 뛰어들었는지를 역지사지의 태도로 따져보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이런 말도 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또한 말할 수 없다.” 생각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면 대화로 풀 수 없다. 그것이 지난 수십년 동안 북-미 협상이 원점에서 맴돈 이유다. 북한이 핵을 버리고 다른 것으로 갈아탈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체제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발전에 몰두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 한국을 방문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북한의 마음을 돌려세울 결단의 메시지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