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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코즈모폴리턴] 피렌체, 오랑 그리고 봉쇄된 도시들 / 조계완

등록 2020-02-20 18:29수정 2020-02-21 09:42

조계완 ㅣ 국제뉴스팀 데스크

1610년대 어느 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피렌체에 있는 집에서 망원경 앞 책상 위에 놓인, 석달간 천체 운행을 기록한 천문 노트를 굽어보고 있었다. 페스트가 창궐해 구시가에서 여러 명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에 그는 “그자들이 또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걸 쉬쉬했구나” 탄식한다. 모두가 겁을 집어먹고 도시를 떠나 황급히 도망치는 와중에 집 앞에 온 마차에 가족만 태우고 그는 홀로 남는다. “관측 기록을 계속하기 위해” 페스트도 피하지 않았다고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희곡 <갈릴레오의 생애>에서 괴질이 퍼지고 있어도 의연하게 관측을 중단하지 않은 이 불굴의 일화를 대본 제5막에 삽입했다.

“말없이 죽음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만 가득한 (14세기) 중국의 도시들”, “페스트 사태를 선언하고 도시를 폐쇄하라”(오랑시의 전보 공문). <페스트>(알베르 카뮈)에 나오는, 지금 중국과 흡사한 한 대목이다. 1940년대 알제리 해안의 한 도시 오랑에서 역병이 발발해 하루 100여명씩 죽어가는 이 연대기는 건물 층계참 한복판에 죽어 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하면서 시작된다.

“페스트는 정점에 편안히 자리잡고 앉아 착실한 관리처럼 매일매일 죽어 나가는 사람 숫자에서 규칙성을 과시”했다. 두려움 속에 숨죽인 ‘불안’과 조만간 끝날 거라는 ‘믿음’이 뒤엉킨 채 시민들은 봉쇄된 오랑시의 공화국 여신상 아래서 병세의 쇠퇴를 기다린다. 4월 중순 발발한 페스트는 당최 물러설 가망이 없어 ‘이제 아예 기다리지 않게 됐을’ 무렵인 그해 12월이 되어서야 퇴각하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쥐들이 다시 나타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병세 후퇴의 표지였다.

20일 현재 맹위를 떨치고 있는 코로나19 감염 국가는 총 29곳이다. 지구가 하나의 생명체 조직인 양 코로나 열병에 전염되고 있다. 당시 피렌체 인구는 7만명, 소설 속 오랑은 20만명 도시다. 1100만명 우한을 비롯해 4억명에 이르는 70여개 도시가 일제히 봉쇄되고, ‘탈출’ 항공편이 각 지역에서 뜨고 해상·병원·호텔·공군기지·고도에 사람들이 격리되는 광경을 매일 목도하고 있다. ‘세계’라는 단일 거대 도시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품 생산·소비를 넘어 ‘생의 문제’로 이처럼 새삼 깨달아본 적이 일찍이 있었던가? 완전히 격리된 외딴섬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망칠 수는 있어도 완벽하게 숨을 수는 없다. 피렌체 길가에서 복면을 한 남자들이 긴 막대에 매달아 집안 창문으로 건네주는 빵을 받고 갈릴레이는 말했다. “이놈의 역병은 어차피 어디에나 있는 거요.”

위험을 무릅쓴 채 방역·치료 최전선에서 묵묵히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분투,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여기저기 강제 격리당하는 세계인들에게 우리들이 보내는 연민… 눈부시게 질주해온 디지털·인공지능(AI)·생명공학도, 문명을 고양해온 온갖 학설과 사회 이념도 무력할 뿐이다. 세계의 이 겨울, 도처에서 끈덕지고 발작적으로 활보하는 질병에 세계시민은 거리와 장소들, 도시 전체까지 삽시간에 텅 비워 내주고 탈출하고 있다.

질병은 가끔 은유적으로 진단·해석돼 왔다. 페스트 같은 인류 역병의 역사가 ‘만성’이라면, 21세기 코로나는 동시 접속과 순식간의 연쇄 격리·봉쇄로 상징되는 ‘급성’이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수십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 잠자고 있거나 방·지하실, 트렁크·손수건·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우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고 카뮈는 그 ‘급성’과 ‘연민’을 역병 연대기에 적었다.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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