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석 ㅣ 문화비평가
“회사 가기 싫어. 집에서 일하면 안 돼?” 노래 부르던 사람들이 있다. 신종 바이러스의 유행으로 인해 이들이 한꺼번에 기회를 얻었다. 출퇴근 지옥에서 벗어나 여유롭게 홈 오피스의 낭만을 즐기는 사람도 간혹 있겠지. 불편한 양복 대신 파자마, 꼴 보기 싫은 상사 대신 고양이를 앞에 둔 덕분에 능률이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준비 안 된 많은 이들은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집에 있는데 집에 가고 싶어!” 그들이 재택의 프로, 혹은 20년차 방구석 작업자에게 조언을 구해왔다. 공교롭게도 나는 올해 초 ‘집에서는 절대 일 못 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집단 재택근무의 실험을 해보았다.
“침대에서 일하면 안 돼요?” 이런 사람들이 꽤 많다. 원론적으로는 안 될 것도 없다. 트루먼 커포티는 말했다. “나는 완전히 수평적인 작가예요. 눕지 않으면 생각을 못 해요.” 마르셀 프루스트는 침대에 누운 채 베개 두개로 머리를 받치고 무릎에 노트를 올리고 글을 썼다. 그런데 이들이 침대를 택한 이유는 게으름 때문이 아니었다. 주변의 소음과 시선을 벗어난 가장 개인적인 공간, 어쩌면 관(棺)과 같은 곳에 자신을 가두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직장인의 업무는 이와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 게다가 프루스트가 고백했듯이 이 자세는 눈과 손목을 학대해 쉽게 지치게 한다.
이제 의자와 책상을 찾자. 당신이 쾌적한 서재 방을 갖춘 ‘저택 근무자’라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불과 옷이 뒤엉킨 침대, 설거짓거리가 쌓인 싱크대, 길어진 방학에 몸부림치는 아이들을 옆에 두고 있는 경우라면 까다로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 집안일에서 도망가려고 직업의 일로 들어가는 사람. 내가 그렇다. 둘, 직업의 일에서 도망가기 위해 집안일을 하는 사람. 곤란하다. 이들은 가급적 집 안이 안 보이는 장소를 찾아야 한다. 확 트인 창, 혹은 정반대로 꽉 막힌 벽. 스티븐 킹은 세탁실 구석에 작은 책상을 두었다고 한다.
“동거인이 제일 걸려요.” 선구적으로 재택근무를 시도한 실리콘밸리에서는 이 문제를 까다로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의 한국처럼 갑작스레 일가족이 재택근무에 들어가면 더욱 당혹스러운 상황이 발생한다. 집 안에선 까칠하기 그지없더니 상냥한 영업용 전화 말투로 가족을 놀라게 하는 딸. 부모가 집에 있는데도 놀아주지 않는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꼬마. 회사 일을 집 안에 들고 와 부인을 비서처럼 부려먹으며 삼시 세끼 차려달라는 남편.
이럴 때는 과감하게 집 안을 ‘공유 오피스’로 만들어보자. 각자 출근 시간에 맞춰 주방 탁자, 컴퓨터 책상 등에 앉는다. 복장까지 갖춰 입으면 업무 기강에 좋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가족이 아니다. 각자의 이유로 출장 와서 비즈니스센터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이다. 업무 시간엔 일체의 사적인 대화를 금한다. 만약 필요하면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개학이 연기된 아이가 있다면, 역시 등교한 듯이 자신의 책상에 앉게 한다. 점심은 배달 음식이 무난하고, 만약 누군가 준비한다면 식대를 지불한다.
미지의 바이러스는 우리를 뜻밖의 실험실에 가두었다. 국가적 규모의 재택근무를 통해 기업은 미래의 근무 방식을 타진해볼 수 있다. 이미 일주일에 이틀 정도 재택근무를 하던 곳은 지금의 상황에 훨씬 유연하게 대처하고 있을 것이다. 개인은 또 개인대로 스스로를 가늠해볼 기회다. 나는 재택형인가, 출퇴근형인가? 재택이 어울린다면, 이참에 그에 맞는 직업을 찾아보면 어떨까? 밀집된 대도시의 위험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집을 옮겨도 되는 직업은 무엇이 있을까? 집 안에 갇힌 모르모트들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들이 마구 솟아나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