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우 ㅣ 서울과학기술대 강사(과학기술학)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이자 공중보건 등 분야의 자선사업가인 빌 게이츠가 최근 주요 20개국(G20) 정부를 향해 긴급 호소문을 냈다. 코로나19 팬데믹 앞에서 “생물학적 운명공동체”인 인류가 무엇보다 백신을 세계 공공재로 인식하고 신속한 연구개발에 힘을 합치자는 게 호소의 초점이었다. 공공을 위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요즘이다.
관심은 그가 전한 최근의 백신 개발 소식에도 쏠렸다. 국제 비영리단체인 전염병대비혁신연합(CEPI) 지원으로 8종의 백신이 개발 중이며 그중 하나는 18개월 안에 준비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나타냈다. 18개월은 눈앞의 불길을 끄기에 너무 긴 시간이지만, 백신 개발과 생산에 보통 10년 또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시간표는 지금 전례 없는 속도전이 진행 중임을 말해준다.
백신 속도전은 상황의 긴급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래에 등장한 이른바 플랫폼 백신 기술 덕분에 가능해졌다. ‘하나의 병원체에 하나의 백신’이 전통적인 백신 개발 방식이었다면, 플랫폼 백신 기술은 플랫폼이 되는 기반기술에다 병원체마다 다른 대응기술을 탑재하는 식으로 신속하게 백신을 개발하는 전략으로 주목받는다. 기술 요소를 모듈처럼 만들어 결합하고 변용하면 백신 시간표를 한층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백신은 독성을 약화 또는 사멸시킨 바이러스나 그 단백질 조각을 항원으로 이용한다. 그것을 몸에 넣어 면역계가 스스로 항체를 만들어내게 한다. 그런데 항원 성분을 찾아내고 정제하고 또 안전성 심사를 거치고 대량생산하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에 비해 플랫폼 백신 분야에서는 기반기술인 플랫폼 모듈의 안전성이 한번 검증된다면, 이후에 같은 플랫폼에 다른 항원을 붙인 신종 백신의 안전성 심사는 크게 줄어들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여기에 다른 신기술도 합세하고 있다. 예컨대 항원이 되는 바이러스 단백질 조각을 백신 공장이 아니라 우리 몸이 직접 만들어내게 하는 방식이다. 세포에 이런저런 단백질을 만들라고 지시하는 전령아르엔에이(mRNA) 성분을 잘 설계해 넣어주면, 세포 안에서 항원 단백질 조각이 만들어지고 이어 우리 몸 면역계는 항체를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항원 생산 과정을 대폭 줄일 수 있다.
플랫폼 백신 기술은 첨단 연구를 내세우는 멋진 유행어처럼 쓰이기도 했다. 많은 연구진이 플랫폼 기술을 기반으로 백신 개발에 나서고 있다. 어쩌면 이제 신속과 안전, 효능을 보여주는 본무대에 오른 셈이다. 백신 속도전에서 세계 공공재를 위한 국제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경쟁이 필요하다면 공공을 위한 선의의 경쟁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