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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관료가 된 법관 / 류영재

등록 2020-04-26 14:45수정 2020-04-27 09:24

류영재 ㅣ 대구지방법원 판사

코로나19로 인해 멈췄던 재판이 재개되었다. 감염병이 전세계를 휩쓸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일상이 변해도 삶은 이어지듯, 재판도 멈추지 않는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표현이 존재하긴 하지만, 법은 이 사회의 룰(rule)이기에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자유와 권리는 법을 통해 구체화되고 자유와 권리에 대한 침해 역시 법에 의해 제재된다. 법은 곧 일상이고 재판 역시 그 연장선이다. 특히 내가 맡은 재판은 평범한 삶에 밀착하여 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피고인 또는 피해자로 법정에 선다. 음주운전, 폭행, 절도, 사기, 횡령…. 신문에 실릴 법한 큰 사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의미가 가벼운 재판들도 아니다. 법정에 처음 선 사람도 있고, 다시 법정에 선 것을 통탄하는 사람도 있다. 억울한 사람도 있고, 법과 재판이 잘못되었다며 화내는 사람도 있다. 범행으로 인해 삶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졌는지 온 힘을 담아 호소하는 피해자도 있다. 한번은 약식명령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피고인의 말이 끊어지지 않아 혼쭐이 났다. 피고인의 말을 듣고 다음 절차를 진행하려 하면 다시 피고인의 말이 이어졌다. 피고인과 내가 서로 말이 끊기는 순간을 기다려 말을 이어가느라 눈치게임 하듯 재판이 진행되었다.

사실은 좌절의 연속이다. 좋은 재판, 우리 소송법이 예정하는 재판을 하고 싶은데, 내가 미력한 탓인지 좋은 재판을 하기가 쉽지 않다. 이론상으로는 재판이 어떠해야 하는지 술술 나오는데 막상 재판을 하다 보면 시간에 쫓겨 많은 것을 생략하게 된다. 피고인과 눈치게임이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단 한번으로 종결되는 재판의 시간이 5분에서 10분 남짓이다. 그나마 지금은 감염병 예방 관리 차원에서 10분에 1건씩 재판을 진행하지만 늘어나는 미제 건수를 생각하면 언제까지 이처럼 느긋하게 재판을 진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쌓인 미제들이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며 아우성을 치는 것 같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재판 속에서 실수를 하게 될까 두렵다. 매뉴얼을 찾아보게 된다. 사건들을 빨리빨리 대량으로 ‘처리’하다 보니 한 사건 한 사건 고민하기가 쉽지 않다. 내 이름 걸고 하는 재판인데 판결을 심사숙고의 결과라며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없다. 이런 경험 속에서 판사들은 점점 ‘자신이 온전히 책임지고 독립하여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숙고하는' 재판을 하기보다는 ‘거대한 조직 안에서 그 조직이 정한 획일적인 기준에 따라 대량으로’ 재판하는 데 익숙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속하고 효율적이며 표준규격에 따라 안정적인 재판을 하는 것이 꼭 해악은 아니다. 판결 간 형평이 보장되고 실수나 자의적 해석이 줄어들며 지연된 정의를 구출할 수도 있다. 그런 방식의 재판이 필요한 경우도 분명 있다. 그러나 그런 장점을 살리는 데에서 나아가 판사가 마치 조직원처럼 사고하고 재판을 마치 상사의 지시에 따라 생산해내는 기성품처럼 여기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판사는 대기업 사원이 아니다. 사법은 관료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일주일에 수십건씩 재판해야 하는 현실이 각박하지만 재판의 본질, 재판에 담긴 삶, 법에의 호소를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 판사들은 이미 조직원이 되어버린 것일까. 사법농단 재판을 끈질기게 취재하여 알리는 언론인들이 있다. 그들이 그려낸 사법농단 재판 속 판사들의 모습을 보자.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자신의 재판 기록을 사법행정 담당 판사에게 보고했다. 사법행정 담당 판사는 재판하는 판사에게 재판의 내용에 관해 조언했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조언들은 다 해당 재판에 반영됐다. 법원행정처 소속 판사들은 특정 재판에 대해서 청와대와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공교롭게도 그 특정 재판을 담당하는 대법원은 재판할 때 법원행정처의 특정 재판에 관한 연구자료도 함께 검토했단다. 기록 속 판사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의 행위가 범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떠나 대기업이 떠오른다. 사법부라는 조직의 이익을 위해 관료적으로 일하며 하향식 지시에 따라 재판을 공유하거나 분업하는 것 같은 모습. 이런 모습이 뭐가 문제냐며 당당히 증언하는 판사들의 모습.

사법농단 재판에서 보이는 모습들을 보면 우리 사회는 도대체 그간 어떤 사법제도를 갖고 있었던 것일까 싶어 서늘하다. 앞으로는 걷어내야 할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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