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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반 고흐를 위한 ‘포스트 코로나’ / 안영춘

등록 2020-05-05 17:24수정 2020-06-09 18:35

‘빛의 벙커 : 반 고흐’ 전시전. <한겨레> 자료 사진
‘빛의 벙커 : 반 고흐’ 전시전. <한겨레> 자료 사진

한달 남짓 전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한 점이 도난당했다. 코로나19 사태로 휴관 중인 네덜란드의 한 박물관에서 벌어진 일이다. 바이러스 창궐에 따른 찰나 같은 보안의 빈틈을 도둑은 대범하게 파고들었다. 훔칠 배짱도 능력도 없고, 작품값에서 초현실감밖에 느끼지 못하는 나는, 죽기 전 저명 화가의 작품 한 점 소장할 기회가 오면 무조건 반 고흐 작품을 고를 거라고 멋대로 상상했다. 내 주머니 사정이 대수인가. 천문학적인 작품값은 어차피 화가 자신에게도 한푼 귀속되지 않은 것을.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어빙 스톤 지음, 최승자 옮김) 같은 전기나 <반 고흐, 영혼의 편지>(신성림 옮김) 같은 편지글을 읽다 보면, 그림을 향한 그의 불타는 열정만 와닿는 게 아니다. 살아서 작품 한 점 제대로 팔지 못할 만큼 싸늘했던 미술계의 외면과 처절했던 가난, 또 굶주림까지도 읽는 이의 가슴을 후빈다. 그가 예술 활동을 이어가고자 화가협동조합 만드는 일에 고군분투했던 사실을 알면, “그의 불행이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했다”는 언급조차 감히 삼가게 된다.

반 고흐가 꿈꿨던 화가협동조합은 일종의 ‘사회 부조’다. 그가 흔히 싸구려 독주 압생트에 취해 살았던 일탈적인 개인 이미지로 재현되는 것을 생각하면, 그의 시스템적인 사고는 적잖은 이질감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물감을 사기 위해 무시로 동생에게 손을 벌려야 했던 곤고함이 도대체 그에게 미학적으로 무슨 쓸모를 제공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단지 화상들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생존의 벼랑 끝에서 홀로 아슬아슬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우리 사회를 덮치면서 문화예술계도 직격탄을 맞았다. 대한민국 어느 한구석 온전한 데가 없지만, 살림살이가 나았던 분야는 그나마 변통할 여지라도 있다. 문화예술계는 다르다. 지독한 빈곤은 대다수 문화예술인에게 애초 기본값이었다. 일찍이 사회 안전망에서 벗어나 있던 그들은 지금 빈곤보다 더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미지의 무언가를 다시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다. 문화예술을 사랑한다는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문화예술인 대다수는 프리랜서다. 4차 산업혁명으로 가장 보편적인 고용 형태가 될 거라는 프리랜서는, 따지고 보면 반 고흐 시절 이전부터 있었던 오래된 직업군이다. 프리랜서의 어원이 서구 중세 기사였다는 조각 지식을 들먹이려는 게 아니다. 목숨을 담보로 내놨던 기사를 비롯해, 프리랜서의 변치 않는 속성은 사회 안전망으로부터의 소외라는 사실을 상기하려는 것이다. 그나마 중세 기사는 고귀한 신분이었다. 21세기 프리랜서는 중세 농노보다 더 열악한 신분인지도 모른다.

코로나19 사태는 먼지 떠다니는 환등기 불빛처럼 우리 사회의 취약점들을 연속해서 비추고 있지만,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뉴노멀’(새로운 기준)의 운전대를 어느 쪽이 쥐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극과 극으로 달라질 것이다. 도둑이 박물관을 털듯이, 시장 자본주의로 빚어진 재난을 다시 공공부문 사영화를 확대하는 기회로 삼으려는 ‘재난 자본주의’의 음모와 이데올로기가 때맞춰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정부의 정책 방향은 종잡기 어렵다. 프리랜서와 특수고용형태(특고) 노동자까지 아우르는 전국민 고용보험제를 도입하라는 요구에는 나름 발 빠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정부가 내건 ‘한국형 뉴딜’의 깃발은 의료 민영화를 비롯한 자본의 요구를 대대적으로 수용하는 쪽으로 펄럭이는 듯하다. 어느 쪽이 진짜 속내인지 알려면 긴급재난지원금 지급 범위를 둘러싼 논쟁에서 보여준 정부의 태도를 되새겨보면 된다. 정부는 버릇 잘못 든 반려동물처럼 완고히 버티다 억지로 끌려왔다.

정해진 날 또박또박 월급이 나오는 나는, 특고 프리랜서인 큰딸의 몰락한 수입과 아르바이트 노동자인 작은딸의 임금 체불로 코로나19의 심각성을 간접 체험하고 있다. 단단해 보이는 내 발치 아래도 언제 어떻게 천길 낭떠러지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실존적이다. 그럼에도 위기는 기회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우리 하기 나름이다. “만국의 반 고흐들이여, 단결하라!”

안영춘 ㅣ 논설위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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