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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꾸벅꾸벅 졸던 전두환이 눈을 번쩍 뜬 이유 / 권혁철

등록 2020-12-03 17:04수정 2020-12-04 17:41

전두환씨가 지난 11월30일 오후 1심 재판을 마치고 광주지법을 떠나고 있다. 전씨는 이날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광주/연합뉴스
전두환씨가 지난 11월30일 오후 1심 재판을 마치고 광주지법을 떠나고 있다. 전씨는 이날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한 사자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광주/연합뉴스

권혁철 ㅣ논설위원

나는 전두환씨가 대통령을 할 때 대학에 들어갔다. 당시 대학생들은 ‘광주학살의 원흉’ 전씨를 ‘살인마’ 또는 ‘무식한 대머리’라고 불렀다. 대학가에는 전씨가 시인 미당(未堂) 서정주와 대화하면서 한자 미(未)와 말(末)을 헷갈려 ‘말당 선생’이라고 불렀다는 우스개가 돌아다녔다. 전씨가 철권통치를 강행한 탓에 ‘무식한 게 힘만 세다’는 반감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그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지난달 30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전씨는 재판 내내 졸다가도 핵심 쟁점인 헬기 사격 여부에는 집중하는 영악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이런 전씨를 보면서 ‘전혀 무식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재판 기간 3차례 법정에 나왔는데 모두 졸다 깨기를 반복했다. 지난 4월 재판에서 판사가 꾸벅거리던 전씨에게 “검찰의 공소사실을 인정하냐”고 물었다. 졸던 전씨는 또박또박 부인했다. “내가 알고 있기론 당시 헬기에서 사격한 사실이 없는 거로 압니다. …대한민국 아들인 헬기 사격수가, 중위나 대위나 될 텐데,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우리 나이로 아흔이고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그가 40년 전 헬기 조종사 계급까지 적시했다.

왜 전씨는 재판 내내 졸다 헬기 사격 이야기만 나오면 정색하면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을까.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이 5·18 민주화운동 기간 계엄군의 헬기 사격 여부였기 때문이다. 고 조비오 신부의 사자명예훼손 여부를 가리는 재판인데, 허위의 사실을 적시했을 때만 혐의가 인정된다. 법원이 5·18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전씨의 유무죄를 따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전씨를 비롯한 신군부는 5·18 당시 계엄군 발포를 ‘우발적이고 자위권 발동 차원’이었다고 아직도 주장하고 있다. “계엄군이 80년 5월 무법천지가 된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시위를 진압하던 중 시위가 격화되어 부득이 자위권을 발동하여 무력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계엄군이 5·18 때 광주 시내에서 헬기 사격을 했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자위권 발동 주장은 허물어지게 된다.

군의 자위권 행사에는 엄격한 제한 요건이 붙는다. 자위권은 적대 세력의 무력 공격을 저지·격퇴하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에 한하여 허용된다.(필요성) 무력 공격의 저지·격퇴 목적에 비례하는 범위 내로 자위권 행사 수단은 제한돼야 한다.(비례성) 신군부 쪽은 ‘계엄군이 어쩔 수 없이 발포한 경우에도 생명에 지장이 없도록 하반신 밑을 조준하여 제압했다’고 설명했다. 자위권 제한 요건을 염두에 둔 이야기다.

5·18단체 회원들이 전두환씨 1심 재판 선고를 닷새 앞둔 지난 11월25일 광주광역시 동구 전일빌딩에서 전씨의 엄벌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5·18기념재단 제공
5·18단체 회원들이 전두환씨 1심 재판 선고를 닷새 앞둔 지난 11월25일 광주광역시 동구 전일빌딩에서 전씨의 엄벌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5·18기념재단 제공

헬기 사격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뤄지는 자위권 행사와는 거리가 멀다. 헬기 사격은 사전에 준비·계획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헬기는 이륙 전 총탄, 로켓탄 같은 무장을 미리 해야 한다. 80년 광주에 투입된 코브라 헬기(AH-1J)는 20㎜ 벌컨포, 2.75인치 로켓으로, 500엠디(MD) 헬기는 7.62㎜ 기관총, 2.75인치 로켓 등으로 무장했다.

헬기 사격의 파괴력은 지상 사격에 견줘 훨씬 강하다. 자위권 행사 요건인 비례성과도 맞지 않는다. 헬기 사격은 넓은 지역에 화력을 집중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대량 살상이 발생한다. 신군부가 무장헬기를 광주에 투입하고, 사격한 것은 광주 시민들을 집단 살해하는 민간인 학살에 해당한다. 군사교리 측면에서 헬기 사격은 적과 교전 중인 아군을 돕는 근접항공지원작전(CAS)에 해당한다. 헬기 사격은 5·18 당시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국군이 국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무차별 공격했다는 뜻이다. 헬기 사격이 인정되면서 전씨가 40년 넘게 펴온 자위권 논리가 송두리째 무너졌다. 이번 판결은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 이후 오랜 쟁점이었던 5·18 헬기 사격을 사법부가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씨는 이번 판결에도 불구하고 헬기 사격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최근에도 골프를 하고 항의 시위대에 욕설을 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이승의 시간이 길지 않다. 5·18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전씨가 국민과 피해자들에게 사죄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결자해지하길 바란다.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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