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철 ㅣ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영국의 그라피티 화가 뱅크시의 그림 <게임 체인저>가 지난 23일 경매에서 1440만파운드(약 224억원)에 팔렸다. 뱅크시 작품 중 역대 최고 낙찰가다. 한 아이가 간호사 인형을 들고 노는 모습을 그렸다. 간호사 인형은 얼굴에 마스크를 하고 히어로처럼 망토를 두른 채 오른팔을 뻗은 ‘슈퍼맨’ 포즈를 하고 있다. 코로나19 시대 진정한 히어로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이 작품의 판매금은 병원 등 보건기구에 기부된다.
앞서 <게임 체인저>의 3배 이상 가격에 팔린 작품이 미술계에서 화제가 됐다.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마이크 윙클맨)의 작품 <매일: 첫 5000일>은 지난 11일 6930만달러(약 785억원)에 낙찰됐다. 비플은 JPG 파일인 이 작품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대체불가능토큰(NFT)을 발행했다. 이 토큰은 위변조가 어려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인증서라고 이해하면 쉽다. 경매 뒤 이 작품의 소유자는 비플에서 낙찰자로 이더리움 블록체인에 기록됐다.
소유권 기록은 블록체인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영역이다. 비트코인이 주목받은 이유도 복제 불가능성 덕분이다. 무한 복제가 쉬운 디지털 공간에서 돈이 복사돼 돌아다니면 가치를 잃는다. 비트코인은 블록체인이란 디지털 장부에 소유권을 기록해, 해당 비트코인 소유자를 증명한다. 가가 나에게 비트코인을 전송하면, 블록체인에 이 내역이 기록돼 코인의 소유자가 나라는 걸 증명한다.
또 다른 대체불가능토큰 사례도 있다. 트위터 창업자 잭 도시는 2006년 자신의 첫 트위트에 대한 엔에프티를 발행해 최근 경매로 팔았다. 트위트 한줄의 소유권이 290만달러(33억원)에 팔린 것이다. 이 트위트는 여전히 트위터 서버에 있으며 누구나 검색해볼 수 있다. 다만 블록체인상 소유자는 잭 도시에서 낙찰자로 바뀌어 있다. 공개된 남의 트위트를 왜 살까? 트위트의 엔에프티를 만들어 경매에 부칠 수 있는 웹사이트 ‘밸류어블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온라인 갤러리에 전시하고, 리셀(Resell)할 수 있다. 엔에프티는 야구 카드에 선수 사인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요즘 한창 커지는 한정판 스니커즈 시장과도 닮았다. 나이키는 가수 지드래곤과 2019년 협업해 한정판 스니커즈 ‘에어포스원 파라노이즈’(22만원)를 내놨다. 추첨을 통해서만 팔았고, 그중에서도 소량인 지드래곤 친필 사인이 적힌 스니커즈는 리셀 플랫폼에서 많게는 2000만원대에 팔렸다. 가격을 올리는 메커니즘이 비슷하다. 유명인, 희귀성, 투자성 그리고 서사. 위 뱅크시의 <게임 체인저>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유명 아티스트가 코로나19 자선 경매를 위해 그린 유일한 작품.
그동안 ‘도대체 어디에 쓰면 좋냐’는 질문을 받아온 블록체인 기술이 드디어 적당한 사용처를 찾은 것 같다.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는 ‘내재가치가 없다’는 비판(제롬 파월 미국 연준 의장,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을 받아왔다. 그런데 애초 이런 질문이 이뤄지지 않는 곳이 예술계다. 남성 소변기(마르셀 뒤샹의 <샘>), 바나나(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도 예술 작품이 된다. 저 작품은 ‘내재가치가 없다’고 따지지 않는다. 비트코인은 ‘실체가 없어 신뢰하기 힘들다’는 사람도 많지만, 디지털 작품에는 실체를 지적할 여지도 사라져 버린다.
소유권을 증명하는 이 토큰은 위작이 골치인 미술계에 새로운 활력을 줄 수도 있다. 이미 소더비, 크리스티 등 세계적인 경매사들이 대체불가능토큰 시장에 뛰어들었다. 한국에서도 서울옥션블루가 준비 중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열린 시장은 아니다. 누구나 트위트를 토큰으로 만들어서 팔 수는 없을 거다. 유명하고, 구하기 힘들고, 스토리가 있어 나중에 더 비싸게 팔릴 것 같은 디지털 파일이 있다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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