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진보정치] 장석준ㅣ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5월15·16일 양일간 칠레는 역사의 변곡점이 될 선거를 치렀다. 지방선거와 함께, 새 헌법을 기초할 제헌회의 선거가 실시됐다. 그런데 결과가 충격적이었다. 1970년대에 이 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시작된 신자유주의 시대를 끝내자는 이들이 절반 넘는 의석을 차지한 것이다.
이번 선거의 발단은 2019년 말의 격렬한 저항운동이었다. 당황한 우파 정부는 새 헌법을 제정해 대중의 요구를 받아 안겠다고 약속했다. 일단 시위를 잠재우고 보자는 궁여지책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많은 시민이 거부 입장을 보였으나, 개헌 약속이 의회의 동의를 얻자 이를 근본적 변화의 계기로 만들어보자는 분위기가 일었다.
이런 분위기는 작년 10월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확인됐다. 79%가 개헌에 찬성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의회가 아닌 제헌회의를 소집해 헌법안을 작성하자는 쪽에 표를 던졌다. 우파의 반발을 의식해 제헌‘의회’가 아니라 제헌‘회의’라 했지만, 어쨌든 2019년 항쟁 이후의 여론을 반영한 새 대표기구를 소집해 새 헌법을 제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실시된 제헌회의 선거에서 최대 승자는 ‘2019년 항쟁 블록’이었다. 우선
공산당, 확대전선 등이 결성한 급진좌파 선거연합이 18.7%를 얻어 집권 우파(20.6%)를 바짝 뒤쫓는 2위가 됐다. 반면에 타협적 민주화를 주도하며 오랫동안 우파와 함께 양대 세력을 이뤄왔던 사회당, 기독교민주당 등 중도세력은 14.5%를 득표하며 4위로 주저앉았다. 지방선거에서도 수도 산티아고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급진좌파가 승리하고 대선 예비주자 중 여론조사 1위도 공산당 소속 레콜레타시장 다니엘 하두에인 것을 보면, 급진좌파가 상승세임을 알 수 있다.
한데 이보다 더 충격을 준 것은 무소속 후보들의 약진이었다. 총 155석 가운데 무소속이 무려 65석이다. 하지만 정당에 속하지 않았다 하여 색깔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가령 무소속 중 26인은 ‘민중 명부’라는 선거연합을 통해 진출했는데, 이들은 2019년 항쟁 주역 중 기존 정당에 속하지 않은 인물들이다. 대개가 페미니즘 운동가이거나 환경운동, 선주민운동 투사들이다. 이런 성향의 무소속과 급진좌파 의원들로 이뤄진 ‘2019년 항쟁 블록’이 제헌회의의 과반을 차지한다.
헌법안은 제헌회의의 토론과 표결을 거쳐 내년 이맘때에야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의석 분포만 봐도 새 헌법 내용이 어떠할지는 충분히 짐작된다. 완전히 청산되지 못한 군부독재 잔재를 씻어낼 테고, 참여민주주의를 강화할 것이다. 또한 민중의 경제사회적 권리를 확대해 신자유주의 체제의 종식을 선포할 것이다.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는 3분의 1 이상 의석을 차지하는 데 실패한 우파는 이런 도도한 시대정신에 맞서기 힘들 것이다.
이런 칠레 상황과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교하면,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마태오복음)이라는 성서 문구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칠레와 한국은 모두 1980년대에 군부정권에 맞서는 치열한 투쟁 끝에 민주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이 군부정권과 타협해서라도 어쨌든 새 헌법을 채택해 제6공화국 시대를 연 반면에 칠레는 1980년에 군부정권이 제정한 헌법을 폐기하지 못했다. 이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가 칠레보다 앞선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반대다. 군부독재 잔재인 현행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요구 덕분에 칠레에서는 오히려 21세기 생태 위기와 불평등을 해결할 민주공화국의 새 방향을 토론하고 합의할 기회가 열렸다. 물론 이 기회를 연 것은 거대한 대중투쟁이었다.
우리가 마땅히 진지하게 주목해야 할 실험이다. 대중운동과 국민투표, 제헌회의 소집, 새 헌법안 내용까지 모두 말이다. 한국 사회도 한 세대 전에 만들어진 낡은 헌법의 틀 안에서 언제까지고 속 좁은 정치인과 언론이 강요하는 ‘이대남’ 논쟁 따위에나 머무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