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살해적 음해” “명예에 큰 상처”
회견문에 ‘비우호적 환경 탓’ 돌려
여권 ‘꽃가마’ 기대했지만 불발
전문가들 “위험 감수할 의사 없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바른정당 당사를 찾아 정병국 대표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반 전 총장은 이날 새누리당, 바른정당, 정의당을 방문한 뒤 오후 3시30분에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1일 오후 3시30분, 불과 10여분 전에 기자회견 사실을 공지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국회 정론관에 등장해 준비한 자료를 읽어 내려갔다. 첫 문장을 시작할 때조차 기자들은 물론 그와 가까운 지인들도 그게 불출마 선언인 줄 알지 못했다. 기자회견 직전까지 반 전 총장은 새누리당·바른정당·정의당을 방문해 “협치·분권을 통해 국민대통합을 해야 한다”며 협조를 부탁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상의 주머니에 “정치교체를 이루고 국가통합을 이루려던 순수한 뜻을 접겠다는 결정을 했다”고 적은 회견문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조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최근 사석에서 농담처럼 “지지율이 낮아서 관둬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거나, 지난 주말부터 핵심 측근 사이에서 ‘하차 메시지’를 고민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지만 당시엔 주목받지 못했다.
반 전 총장은 왜 뜻을 접은 것일까. 그는 회견문에 “(정치권의) 일부 구태의연하고 편협한 이기주의적 태도에 지극히 실망”, “인격살해에 가까운 음해”, “개인과 가족, 유엔의 명예에 큰 상처”란 격한 표현을 썼다. 자신의 준비 부족보다 비우호적인 환경 탓으로 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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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전 총장은 이날 회견 뒤 참모들과 만나 “순수하고 소박한 뜻으로 시작했는데 너무 순수했던 것 같다. 정치인들은 단 한 사람도 마음을 비우고 솔직히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더라. ‘정치는 꾼에게 맡기라, 당신은 꾼이 아닌데 왜 왔느냐’고 하더라”고 털어놨다. 정치를 개인의 순수한 신념이나 역량 차원으로 바라봤다가 벽을 느끼자 정치판 자체를 원망하며 중도 하차를 택한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그의 한 참모는 “반 전 총장은 귀국 직후부터 ‘사람들 잔뜩 모았다가 내가 잘못돼서 그들이 다치면 어떻게 하느냐’며 미안해했다”며 “지지율 하락 때문이 아니라,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 착해서 관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치권이나 전문가들 사이에는 준비 부족에 따른 지지율 추락과 이에 대응할 정치력 부족,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캐릭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진보인지 보수인지 지향점이 분명하지 않으니 지지층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본인이 역부족을 느낀 것 같다”고 말했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비문재인·비박근혜를 아우르는) 빅텐트를 시도했는데, 이를 위해 접촉한 이들이 다 부정적으로 돌아선 게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은 “국민들이 대통령 후보를 정치집단의 대표로서 바라본다는 걸 몰랐던 것 같다. 정당정치의 개념이 없이 누구라도 손을 잡고 후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와서 보니 유권자들의 시선이나 정치지형에서 부딪친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순실 게이트’로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몰락한 게 결과적으로 그의 결정적 하차 원인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다.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여권이 분열되지 않고 일대일의 여야 구도였으면 선택이 쉬웠을 것”이라며 “지금은 불확실성이 크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어서 아마추어가 방향을 잡고 풀어나가기 어려웠다”고 평가했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애초 반 전 총장은 변변한 대선주자가 없던 유일 여당의 ‘꽃가마’를 기대했던 것 같다. 오늘 발표문을 보니 자신은 아무런 희생도 모험도 감수할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씁쓸해했다. 석진환 윤형중 기자 soulfat@hani.co.kr[관련 영상] <한겨레TV> | 더 정치 37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