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으로 총선 출마를 선언한 신지예 전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23일 저녁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2020년은 그에게 어떤 해로 기억될까. 8년간 몸담아 활동했던 녹색당은 제21대 총선을 앞두고 ‘비례연합정당’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고, 비슷한 시기 당직자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해 몸과 마음을 추슬러야했다. ‘정치의 정도를 지키는 일도, 성폭력 피해를 해결하는 일도 지금의 당에서는 해결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나서야 탈당 결심이 섰다. 지난 18일 녹색당을 탈당한 뒤 오는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서울 서대문갑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신지예(30) 예비후보를 23일 저녁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서 만났다. 신 후보는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 논란과 관련해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끔찍하고 우울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고 비판했다. 성폭력 피해를 공개적으로 밝힌 이유에 대해서는 “‘정치인’과 ‘성폭력 피해자’는 서로 어울리지 않다는 사회적인 통념에 맞서고 싶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18일 녹색당을 탈당했다. 당시 탈당문에서 “대한민국 정치사에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을 위성정당 참여 명단에 녹색당 이름이 언급되는 것을 보며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녹색당의 비례연합정당 참여는 개별 정당 차원에서나, 전체 정치 구도에서나 절대 참여해서는 안되는 판이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한국 정치에서 제3지대를 만들겠다는 녹색당의 당헌과 강령을 어기는 일이었다. 두 번째로는 준연동형비례대표제 도입을 통해 다당제를 구현하겠다는 시민사회 목표와도 맞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국민의 참정권을 유린하는 일이었다. 비례연합정당의 계획대로면, 국민들은 비례대표 선거에서 자신의 표를 어느 당에 던졌는지도 모르게 투표를 해야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한국 정당사에서 가장 끔찍한 시기. 우울한 시대를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2월 정치개혁연합은 더불어민주당·정의당·녹색당·미래당등 범 진보 정당이 모인 ‘비례연합정당’ 창당을 시도했고, 녹색당은 지난 15일 당원총투표를 통해 참여를 결정했다. (찬성 74.06%, 투표율 51.33%)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은 또 다른 플랫폼 정당이었던 ‘시민을 위하여’와 연합을 선언했고, 녹색당은 “허울뿐인 선거연합 참여는 중단하겠다”고 반발했다. 정치개혁연합은 결국 24일 해산절차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녹색당 당원총투표에서는 비례연합정당에 대한 찬성 여론이 높게 나왔다. 8년간 활동했던 소수정당으로서 원내 진입이 절박하지 않았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녹색당은 당연히 국회에 가야하지만 그건 도구에 불과하다. 왜 녹색당이 정치를 하는가? 기후위기와 페미니즘, 기본소득처럼 당이 추구하는 가치를 통해 사회를 바꾸고 싶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국회에 진출해야한다는 것이지, 일단 국회에 가고 난 다음에 생각하자는 건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일이다. ‘현실 정치를 모른다, 너무 나이브한 태도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됐나? 비례연합정당 참여를 주장했던 것이 훨씬 더 나이브했다. 현실정치를 모르고 ‘너무 나이브하게’ 민주당을 믿었다.”
‘신지예’라는 이름 석 자를 알린건 지난 2018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하면서였다. 기호8번 녹색당 후보로 출마한 그는 ‘페미니스트 서울 시장’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고, 1.7%를 득표해 4위에 오르며 선전했다. 이번 총선에서도 녹색당 후보로 지역구 출마를 고려했지만, 올해 초 당직자로부터 성폭력 사건을 겪고 나서 탈당을 결심했다.
“성폭력 혐의는 준강간치상이다. 당직자에게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했다. 검찰로 송치됐고, 재판 날짜가 확정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 초기에 대처를 잘 하고 증거를 잘 모아서 재판 과정은 어렵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사실 처음 사건을 겪었을 땐 ‘정치를 그만해야하나’ 생각이 들었다. 2017년 미투 당시 문화계·스포츠계·스쿨미투처럼 한국사회 곳곳에서 미투 고발이 나왔는데, 나오지 않은 곳 중에 하나가 정치 영역이었다. 지역에서 구의원이나 시의원을 하고 있는 제 또래의 여성 정치인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폭력이 일상이다. 남성 동료 의원이 갑자기 뒤에서 안는다거나, 같은 의원인데 술을 따르라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여성 정치인이 ‘미투’를 하는 순간 정치를 못하게 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공천 때문에, 혹은 당 내에서 매장당할까봐 얘기를 못하는 거다.”
무소속으로 총선 출마를 선언한 신지예 전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23일 저녁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그래도 선거를 앞두고 피해 사실을 밝히는데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가장 걱정스러웠던건 ‘내가 더 이상 유권자들에게 정치인으로 보이지 않으면 어떡하지?’였다. 보통 정치인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강하고 이기는 사람’이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야는 정치인으로서 ‘피해자 정체성’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회적인 통념, 그것도 깨야한다고 생각했다. 피해를 겪은 뒤 상담가에게 들은 이야기가 인상깊게 남았다. ‘보통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기 일을 너무 좋아해서 그 일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더 건강하게 그 일을 하고 싶어한다’라고 하더라. 저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비록 녹색당은 아니지만 여성주의적인 정치, 소수자들을 위한 정치를 해나가려는 제 노력이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중단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신 후보는 인터뷰 내내 자신이 겪은 성폭력 피해에 대해 “많은 여성들이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고, 앞으로도 겪을 사건들이기 때문에 얘기하지 않아야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최근 불거진 ‘텔레그램 엔(n)번방 사태’에 대해서도 “정치인들이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일했다면 제대로 처벌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지난 1월 1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국회 국민동의청원을 통해 ‘텔레그램 성범죄 해결 청원’을 올렸지만, 당시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법안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부적절한 발언을 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지탄을 받기도 했다.
-‘텔레그램 엔(n)번방’ 사태를 계기로 ‘국회가 왜 여성 의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지 않느냐’는 호소가 더욱 절박하게 나오고 있다.
“지난해를 떠올렸을 때 정치권이 가장 급박하게 움직였던 의제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바로 ‘검찰개혁’과 ‘선거제 개혁’이었다. 모든 정당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드러눕고, 감금시키고, 폭력을 휘둘렀다. 2017년 미투 이후 관련 법안이 200개가 발의됐는데, 10개 남짓밖에 통과되지 않았다. 당시에도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성착취 영상의 소지와 유포에 대해 입법 보완을 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그때 국회에서 활발하게 논의만 했어도 지금 ‘텔레그램 엔(n)번방’ 사건은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50대 남성 위주의 정치인들은 여성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공포를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걸 자신의 문제로 느끼는 20~30대가 정치의 영역에서 움직여야하고 실천해야하는 이유다. 정치의 얼굴이 바뀌어야 한다.”
무소속으로 총선 출마를 선언한 신지예 전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23일 저녁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신 후보가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서울 서대문갑은 20년 넘게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이성헌 미래통합당 후보가 엎치락뒤치락하며 맞붙은 곳이다. 신 후보는 “양당 중심의 정치에 여성 청년 정치인이 도전하는 구도가 됐다”며 “그 구도를 깨는 것이 이번 선거의 전략이기도 하지만, 정치를 하는 궁극적인 이유”라고 밝혔다.
“미래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이제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둘 중에 하나라도 사라지면 둘 다 사라지는 존재다. 선거 국면에서 양당체제에 대한 비판이 하나의 내 전략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략이라기보다는 내가 정치를 하는 진짜 이유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사회 문제를 여전히 ‘진보 대 보수’라는 낡은 구도로 푸는 것도 양당 정치의 폐해다. 예를 들어 ‘타다금지법’을 통과시켰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택시 노동자들은 여전히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사납금에 시달린다. 앞으로 계속 생겨날 플랫폼 산업을 정치권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도 문제다. 이를 입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랜 숙고가 필요하다. 정치인들이 거대 양당 구조에서 특혜를 누리는 존재가 아니라, 일을 열심히 하는 ‘입법노동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앞으로는 ‘좌우라는 기존의 대립각으로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모두 꺼내보고 싶다. 선거가 끝난 뒤에는 정당 창당도 준비중이다.”
-총선때마다 청년·여성정치인들이 사라졌다는 기사가 반복된다. 이들이 정치에 참여해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과 청년이 정치를 포기하면 한국사회가 정말 더 걷잡을수 없이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 생각한다. 정치혐오로 득을 보는건 유권자가 아니라 기성정치인들이다. 젊은 청년 정치인, 여성 정치인들이 더 많이 출마하고, 더 많이 목소리를 내야한다. 이번 선거가 그 기점이 되어야 한다.”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