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의 “직접 지도 밑에 24일 신형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포-17’형 시험발사가 단행됐다”고 노동신문이 25일 1~4면에 16장의 사진과 함께 펼쳐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시험발사를 현지지도하고 친필명령서를 하달했다고 25일 <노동신문>이 보도했다. 김 총비서가 미사일 발사에 친필명령서를 내린 것은 2017년 11월29일 ‘화성-15형’ 발사 이후 처음이다.
김정은 총비서는 “새로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략 무기 출현은 전세계에 우리 전략무력의 위력을 다시 한번 똑똑히 인식시키게 될 것”이라며 “우리 국가방위력은 어떠한 군사적 위협 공갈에도 끄떡없는 막강한 군사 기술력을 갖추고 미 제국주의와의 장기적 대결을 철저히 준비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고 이날 노동신문은 전했다.
노동신문이 공개한 ‘친필명령서’를 보면, 김 총비서는 군수공업부가 준비한 ‘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포-17’형 시험발사준비를 끝낸 정형보고’ 위에 “시험발사 승인한다. 3월24일에 발사한다. 조국과 인민의 위대한 존엄과 명예를 위하여 용감히 쏘라!”고 적었다.
김 “미국과의 장기 대결 준비”…‘미 반응 더 못기다려’ 판단
김 총비서의 친필명령서를 근거로 “(김정은 총비서의) 직접 지도 밑에 24일 신형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포-17형 시험발사가 단행됐다”는 노동신문 보도는 곱씹어볼 대목이 많다. 김일성 주석 탄생 기념일인 ‘태양절’ 110돌(4월15일) 즈음에 ‘정찰위성’을 명분으로 장거리 로켓을 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한국·미국 전문가들의 예상을 ‘시기’와 ‘내용’ 모두 넘어선 선택이어서다. 더구나 북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는 2017년 11월29일 ‘화성-15형’ 시험발사와 함께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뒤로 1577일(4년 3개월 23일) 만이다.
예상과 달리, 김 총비서가 태양절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정찰위성’용 장거리로켓 발사라는 ‘포장’까지 벗기고 1577일 만에 다시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라는 전략적 군사행동에 나선 것을 두고, 북한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상응조처’를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전략적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정은 총비서는 1월19일 노동당 중앙위 정치국 8기6차 회의에서 “미국의 적대시 정책과 군사적 위협이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위험계선에 이르렀다”며 “(대미) 신뢰구축 조처들을 전면 재고하고 잠정 중지했던 모든 활동들을 재가동하는 문제를 신속히 검토해볼 데 대한 지시를 해당 부문에 포치(공지)”했다. ‘모라토리엄’(핵시험·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유예) 파기를 이미 예고한 셈이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일 의회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단 한 차례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 철군과 그 후폭풍,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란 핵협정 복원 등에 외교 자원을 쏟아부으며 북을 향해선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는 외교적 수사를 넘어선 ‘행동’에는 나서지 않고 있다. 북한은 ‘우선 관심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북한 정부가 바이든 행정부에게 ‘대북 제재 완화’는 커녕 적극적인 북-미 협상조차 당분간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한 듯하다. 통일외교안보 분야 원로 인사는 25일 “김정은 위원장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결정엔 북·미 쟁점 해소에 외교적 자원을 쏟지 않고 소극적 정세 관리에만 치중해온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무관심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미-러 ‘우크라 사태’로 대치중…안보리 추가제재 어렵다 예상
둘째, 미국-중국 패권·전략 경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무력 침공을 계기로 한 미-러 정면 대치에 따른 ‘미국 대 중국·러시아’ 대립 구도 탓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우리라는 셈법도 작용한 듯하다. 유엔 안보리가 25일 오후 3시(현지시각) 공개회의를 소집했지만, 거부권을 지닌 미-중·러 사이의 대립·갈등 탓에 신속하고 효과적인 추가 대북제재에 합의하리라는 기대는 낮다. 북한의 핵시험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를 계기로 한 유엔 안보리의 공개회의 소집은 북의 ‘화성-15형’ 발사에 대응해 추가 제재를 결정한 2017년 12월22일 결의 2397호 채택 이후 1555일(4년 3개월 3일) 만이다.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미·중·러 갈등 탓에 유엔 안보리가 사실상 작동 불능 상태에 빠졌다”며 “김 위원장이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다”고 말했다. 수미 테리 우드로윌슨센터 한국연구센터장도 24일(현지시각) <포린 어페어스>에 실린 ‘북한의 핵 기회주의-김정은은 왜 우크라이나 위기를 이용하려고 선택했나’라는 기고문에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시험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미국 등 국제사회의 대응력 부족과 한국의 정권교체 상황을 이용한 북한의 핵무기 확장 시도라고 진단했다. 테리 센터장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의 열쇠를 쥐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미국과의 대치로 북한에 대한 제재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지적했다.
셋째, ‘미·중·러 3각 전략게임’(미-중 패권·전략 경쟁, 미-러 대치, 중·러 협력)을 북·중·러 북방 3각 협력체제의 복원 및 김 총비서의 대외 운신의 폭을 넓힐 기회로 삼으려는 전략적 포석일 수도 있다. 자주와 주권을 절대가치로 신성시해온 북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유엔 안보리의 두차례 결의(3월1일, 3월24일)에 모두 반대표를 던진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의 ‘반대’는 두차례 모두 ‘기권’ 표결한 중국의 선택보다 훨씬 더 친러시아적이다. 북·중·러 3각 협력체제는 냉전기 북한 경제·안보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이 유럽을 순방하며 대러시아 제재·포위망을 강화하려는 시점에 맞춰 이뤄진 김 총비서의 화성-17형 시험발사와 모라토리엄 파기는 바이든 대통령의 대북 대응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는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러시아 ‘이중 대치’ 전선에 쏟아부을 외교 자원의 일부라도 ‘북한’에 돌리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중·러를 돕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요컨대 김 총비서는 미·중·러 갈등이 가열되는 지금 “신형대륙간탄도미사일 화성포-17형 시험발사”를 하는 게 북에 무관심해 보이는 바이든 행정부를 자극하고, 중·러를 측면 지원하면서도, 유엔 안보리의 고강도 추가 제재를 무산시키거나 뒤로 늦출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며 레드라인을 넘어선 만큼, 향후 더 파괴력이 큰 도발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특히 한국의 정권 교체기를 틈탄 혼란 속 김일성 주석 탄생 기념일인 ‘태양절’과 한미연합 훈련이 예정된 4월 안팎에 추가적 도발에 나설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북한이 이번에 발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일본 상공을 넘어가지 않은 점을 들어서, 북한 역시 아직은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제위기그룹의 한반도문제 선임연구원인 크리스토퍼 그린은 <월스트리트 저널>에 이번 발사가 기존보다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갔으나, 일본 상공을 넘어가지는 않았다는 것을 언급하며 “게임체인저는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도 확실히 (이를) 의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군 관계자는 25일 기자들과 만나 “오늘 아침 북한이 공개보도를 통해 신형 화성-17형이라고 보도한 것에 대해 한미 정보당국이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정밀 분석 중”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그럼 화성-7형이 아니라는 얘기냐’는 질문엔 더는 답변을 하지 않았다. 군과 정보 당국 등은 북한이 전날 실제로는 기존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인 ‘화성-15형’을 쏴놓고도, 이전에 공개하지 않은 화성-17형 성능 시험 발사 때 찍어놓은 사진을 공개 발표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추가 분석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