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 대담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를 지난 10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났다. 월러스틴 교수는 〈한겨레〉와 따로 만나 진행한 인터뷰에서 “북한의 핵실험보다 더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것은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으로선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정치적 성명’ 외에는 실효성 있는 중대한 조처를 아무것도 내놓을 수 없는 상태”라고 분석했다.
-모두 5권으로 마무리될 〈근대세계체제론〉 가운데 지금까지 1~3권이 나왔다. 19~20세기를 다룰 4, 5권을 기다리는 한국 독자들이 많다. 언제쯤 읽을 수 있을까?
=내가 네번째 책을 쓰고 있는 건 맞다. 언제 나오냐 하면…. 내가 책을 다 쓰게 되면 나올 것이다.(웃음)
-북한 핵 실험이 동북아 정세에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인가?
=북한 문제는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북한은 강력하진 않지만 어쨌든 핵을 가졌다. 일본은 자신들의 핵 계획을 추진하는 이유로 북핵을 활용할 것이다. 한국도 그렇게 할 것이다. 대만이 그 다음이 될 것이다. 핵무장에 대한 정치적 결정은 신속하게 이뤄질 것이고, 남은 것은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의 문제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의 모든 나라가 핵무장하는 상황이 된다.
-그렇게 된다면 새로운 동북아시아 냉전이 펼쳐져 지역내 긴장이 더 높아지는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관계를 보면, 두 나라가 핵으로 무장한 것이 전쟁 억지를 보증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핵무장은) 동북아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 각 나라 모두 (전쟁이라는) 게임을 펼치기가 지나치게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 바보 같은 짓을 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확언할 수는 없겠다. 다만 그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동북아 주체는 미국 아닌 한·중·일
-선생은 중심부-반주변부-주변부로 구성된 세계체제에서 한국이 반주변부 국가라고 지적했다. 한국에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통해 한국이 세계체제의 중심부에 성공적으로 편입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멍청한 주장이다. 니카라과, 요르단 등도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나. 중심부 국가로의 성공적 편입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것 자체는 아무것도 보증해주지 않는다. 그 협정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협정의 내용에 따라 그것이 한국을 약화시킬 수도, 강화시킬 수도 있다.
-선생은 중심부 국가의 헤게모니 상실을 입증하는 가장 큰 특징이 군사력이라는 마지막 수단에 의존하는 것이고, 현재 미국은 헤게모니 쇠퇴 국면에 들어섰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9·11 사태는 미국의 헤게모니 쇠퇴에 어떤 영향을 줬나. 9·11 이후의 미국 대외정책은 어떻게 평가하나.
= ‘9·11 공격’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다. 그것은 외관상 거대했고, 미국인들에게 비교적 소규모의 물질적 손실을 줬고, 대단히 큰 정신적 손상을 줬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격이 아니라 그 공격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다. 부시 정권은 기존의 세계질서를 유지하려는 자신들의 정책을 집행하는 데서 9·11을 중요한 변명거리로 삼았다. 그럼에도 세계체제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미국의 시도는 (그 의도와 달리) 예전보다 강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화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중국을 의식한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미-일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한-미 동맹은 미-일 동맹의 하위체제 구실을 하고 있다. 미-일 동맹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현재와 같은 미-일 동맹이 계속 유지되진 않을 것이다. 현재 일본은 두 가지의 중요한 관심사를 갖고 있다. 첫째, 이른바 ‘정상국가’가 되는 것이다. 일본은 2차 대전 이후 정치·군사적으로 제한된 주권을 행사해 왔다. 일본은 이를 변화시키려 한다. 그런데 미국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이런 변화는 미-일 관계의 약화를 뜻한다. 일본이 군사적으로 더는 미국에 의존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두번째 관심사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요한 자본축적국가가 되는 것이다. 이미 그래왔지만 앞으로도 이를 강화시키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과 경제적으로 밀착해야 한다.
고이즈미 전 일본 총리는 ‘정상국가화’만 강조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는 중-일 관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이 점을 얼마나 주목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아베는 일본 내에서 국가주의 강경파의 입지를 다져 왔는데, 막상 총리가 되자마자 미국이 아니라 중국을 방문했다. 역대 일본 총리 가운데 누구도 이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 한국을 보자. 한국은 건국 이래, 특히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강하게 밀착돼 있었다. 그러나 한-미 동맹은 지난 5~10년간 분명히 약화됐다. 이는 주목할 만한 변화다. 한국 정부의 햇볕정책은 미국 정부가 반대할 만한 것이었다. 독일 통일 이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도 일종의 ‘햇볕정책’을 취했는데, 그때도 미국은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미국의 반대가 서독의 햇볕정책을 막지는 못했다. 분명히 한-미 관계는 전보다 강하지 않다. 반면 한-중 관계는 더 향상됐다. 50년 전에는 서로 전쟁하는 사이였는데, 이제는 동등하면서도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다.
-선생은 동북아시아에서 두 종류의 타협, 즉 중·일의 타협 및 남·북한의 타협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앞으로는 어찌 될 것 같은가?
=어떤 타협이 남북한 간에 일어날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과정과 방법으로 통일을 실현할 것인지의 문제는 한국 내부에서도 항상 논쟁하고 있는 사안이다. 한반도 변화의 세부적 양상에 대해 자세히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 정부와 중국 정부가 북한 정권의 붕괴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정부는 더 부드러운 형태의 변화(soft evolution)를 원한다. 이 지역에서 ‘또다른 한국전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미국·중국·러시아·일본·남한·북한 등 모두가 이 점에 동의한다. 물론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동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긴 하다.
-그런 방식의 타협 또는 변화를 미국이 용인할 것으로 보는가?
=솔직히 말해, 미국은 이 사안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주체다. 미국이 내놓을 아무런 카드도 없다. 미국은 북한을 전쟁에 끌어들일 정도로 강하지 않다. 한국·일본·중국도 미국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이유가 없다. 지금 유엔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자. 볼턴 유엔 미 대사는 지난해 내내 북한에 대한 강력한 행동을 주문하는 발언을 계속 내놓았지만, 어느 나라도 설득하지 못했다. 미국은 (볼턴의 발언을 현실화시킬) 그런 힘이 없다. 따라서 미국이 어떤 발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이 지역에서 더 중요한 구실을 하는 주체는 따로 있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지역내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상호작용이 앞으로 동북아에서 일어날 일을 결정할 것이다.
미-중 사이 한국 결정권 많지 않아
-미국이 내놓을 결정적 카드가 없다고 했지만, 미국 대외정책에서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도 약소국에는 치명적 타격을 가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여전히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물론 그렇다. 미국이 예전보다,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보다 약한 힘을 갖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강력하다. 비유하자면 미국은 상처입은 거대한 짐승이다. 상처입은 짐승은 갑자기 폭발할 수 있다. 다른 나라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미국은 예측 불가능한 나라다. 어느 순간 바보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다만 미국이 바보짓을 못하도록 하는 강력한 압력이 존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최근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 북한의 위협을 정치·군사적으로 활용하는 미국의 대외 전략이 더 극단화될 가능성은 없나?
=북한의 핵실험이 미국에 끼치는 영향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미국은 중간선거를 한 달 앞두고 있고, 거대한 규모의 군사적·정치적·심리적 문제를 이라크에서 갖고 있다. 이것이 현재 미국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다. 현실적으로도 미국은 이라크 이외의 지역에 개입하거나 분쟁을 만들 만한 정치적·군사적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다. 미국은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의 ‘언어적 실행’ 외에는 한반도에 대해 실질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을 것이다.
-10년 전 선생은 〈한겨레〉와 서면 인터뷰를 하면서, 미국 정부 또는 국제통화기금의 이데올로기적 권고를 믿지 말고, 세계경제 속에서 상대적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한국인들에게 충고했다. 이제 앞으로의 10년을 내다보는 한국인들에게 다시 한번 충고하실 게 있다면?
=10년 전을 돌아보면, 한국은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처지였다. 당시 언급했던 것처럼 국제통화기금의 권고는 올바르지 않은 것이었고, 한국은 인도네시아·타이보다는 나은 방식으로, 말레이시아보다는 못한 방식으로 이에 대처했다. 그러나 앞으로의 50년을 내다본다면, 문제는 조금 다르다. 향후 50년 동안 세계는 중대한 경제적 동요의 시기에 접어들 것이다. 이는 미국 헤게모니의 쇠락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국면에서 한국은 창조자(maker)나 파괴자(breaker)가 아니라 반응자(responder)일 뿐이다. 앞으로의 상황은 미국과 중국이 만들어갈 것이다. 한국이 여러가지로 애를 쓰겠지만, 그렇다 해도 다른 나라에 비해 어려움을 조금 덜 겪게 되는 데 그칠 것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사진 장철규 기자, 정리 안수찬 기자
sdhan@hani.co.kr
월러스틴은 ‘세계체제론’ 설계자…자본주의-사회주의 이분법 전복
193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석좌교수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공부한 뒤 모교를 비롯해 캐나다 맥길대, 뉴욕주립대에서 가르쳤다. 1994년부터 3년간 세계사회학회(JSA) 회장을 역임했다.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페르낭 브로델을 기리는 ‘페르낭 브로델 센터’ 소장도 맡고 있다.
그의 학문적 여정은 ‘전복과 개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분법을 전복시켜 자유주의 비판으로 진전시켰고, 개별 사회과학의 분화·발전에 대한 신화를 뒤엎어 통합적 사회과학의 탄생을 시도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자본주의의 종국적 승리라는 이데올로기를 뒤집어 자본주의의 결정적 쇠퇴를 내다보았고, 미·소 경쟁에서 이긴 유일 강대국 미국에 대해 그 쇠락을 예견했다. ‘세계체제론’ 역시 서구 중심의 발전론적 시각과 민족국가 단위의 분석틀을 바꿔 사회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보청기를 꽂은 고령의 나이임에도 월러스틴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눈빛을 밝히며 논쟁적이고 도발적으로 말했다. 그는 ‘자유·정의·진리: 시장 근본주의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13일 고려대 국제관에서 열린 고려대 문과대 설립 6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강연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