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28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제5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이재명 대표가 선출된 뒤 두 팔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정치개혁에 소극적이었습니다. 방대한 분량의 대선후보 공약집에 정치개혁은 없었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10대 공약에도 정치개혁은 없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올해 초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정치 양극화 해결을 위한 분권형 대통령제나 내각제 개헌, 중대선거구제 도입 논의’에 대해 의미 있는 답변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자신을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긴 윤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 이전에는 선거에 한번도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다릅니다. 2006년 경기 성남시장에 출마해 떨어졌습니다. 2008년 성남시 국회의원에 출마해 떨어졌습니다. 2010년 성남시장에 당선됐습니다. 2014년에도 당선됐습니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3등을 했습니다.
2018년 경기지사에 당선됐습니다.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진 뒤 곧바로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윤 대통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거 경험이 많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타고난 정치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약속입니다. 정치인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 대표가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10대 공약 가운데 아홉번째가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 추진, 국민주권 실현을 위한 정치개혁과 사법개혁”이었습니다. 공약집 정치개혁 항목에서는 “선거제 개혁으로 제3의 선택을 통한 선의의 정책 경쟁이 가능하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비례대표 확대, 비례대표 제도를 왜곡하는 위성정당 금지 등을 약속했습니다.
이 대표는 2022년 대선 공식 선거운동 기간 하루 전인 2월14일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사거리에서 ‘위기극복·국민통합 선언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적대적 공생이라 불러 마땅한 거대 양당 체제 속에서 우리 민주당이 누려온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겠습니다. 51%이면서 49%를 완전히 배제한 채 100%를 모두 차지하는 거대 양당의 기득권 정치가, 선택을 제한하고 제3의 선택을 막았습니다. 그 결과 국민은 울며 겨자 먹기로 차악을 선택해야 합니다. 차악 선택의 강요는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비협조와 발목잡기로 정치 행정 실패를 유도하는 데 몰두하게 했습니다.”
“표의 등가성이 보장되는 선거제 개혁으로 제3의 선택을 통한 선의의 정책 경쟁이 가능하게 하겠습니다. 비례대표를 확대하고, 비례대표제를 왜곡하는 위성정당 반드시 금지시키겠습니다. 피해를 입은 정당들에 다시 한번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2022년 2월24일에는 송영길 민주당 대표가 ‘국민통합 정치개혁안’을 발표했습니다.
“이재명 후보와 더불어민주당은 국민통합 정부, 다당제 국민통합 국회, 분권과 협력의 민주적 권력 구조 등 시대적 요구를 담아 ‘국민통합 정치개혁안’을 마련했습니다.”
“책임 있는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부터 진영 정치, 대결 정치, 승자독식 정치에 안주했던 것을 반성합니다. ‘더불어시민당’ 창당으로 정치개혁의 대의에서 탈선했던 것은 뼈아픈 잘못이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선거용 아니냐고 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지난 정치 반성하고 새롭게 달라지겠다고 약속하는 게 선거입니다.”
“‘국민통합 국회’를 위해 선거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겠습니다. 민심은 다양합니다. 승자독식 선거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 실질적인 다당제를 구현하고 국민의 뜻을 받들어야 합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위성정당을 방지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권역별 비례대표제, 지방선거에는 3인 이상 중대선거구제 등 비례성을 대폭 강화해 세대, 성별, 계층, 지역 등 다양한 민심이 반영되는 선거제도를 만들겠습니다.”
다음날인 2월25일 대선후보 2차 정치 분야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송 대표의 전날 정치개혁 방안을 두고 후보들이 공방을 벌였습니다.
2022년 2월25일 서울 상암동 에스비에스(SBS) 스튜디오에서 열린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관 제20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2차 정치 분야 방송토론회에서 정의당 심상정(왼쪽부터), 국민의당 안철수, 국민의힘 윤석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토론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재명 후보는 “국민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는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제3의 선택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 비례대표제 확대, 위성정당 금지를 통해 제3당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윤석열 후보는 “정권교체라는 민심의 흐름을 정치교체로 치환하는 선거 전략”이라며 “진정성이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민주당은 2월27일 의원총회를 열어 ‘국민통합 정치개혁’ 결의문을 채택했습니다.
“위성정당으로 선거개혁을 실종시킨 ‘승자독식 정치’, 우리 잘못에는 눈감는 ‘내로남불 정치’, 민생 현실과 동떨어진 ‘소모적 대결 정치’, 민주당이 먼저 반성합니다.”
3월1일 이재명 후보와 김동연 후보가 단일화를 앞두고 ‘정치교체를 위한 공동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양당 기득권 정치를 타파하는 정치교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 정치개혁 법안을 만들어 대통령 취임 전 국회에 제출한다. 개혁법안에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 선거제도 개혁, 국회의원 면책특권 폐지, 국민소환제 도입, 국회의원 3선 초과 연임 금지 등을 포함한다.”
이처럼 간절한 정치개혁 약속에도 불구하고 이 대표와 민주당은 대선에서 패배했습니다. 하지만 민주당의 정치개혁 약속은 이어졌습니다. 2022년 8월28일 이 대표 선출 전당대회에서 민주당은 ‘당원 일동’ 명의로 ‘국민통합 정치교체를 위한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김동연 정치교체위원장이 낭독했습니다.
“정치교체의 요체는 적대적 공생의 양극화 정치를 끝내고 협력과 연합의 정치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와 다양성을 확산하는 길입니다. 대화와 타협을 어렵게 하고 정치 불신을 가중시키는 현행 선거법을 개정하고 국회의원 특권을 내려놓는 제도적 개혁을 내년 4월 중에 마무리 짓겠습니다. 정당정치의 풀뿌리 기반을 약화시키는 정당법과 정치자금법도 개정하겠습니다.”
민주당은 스스로 정한 시한인 2023년 4월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정치관계법은 민주당 마음대로 개정하기 어렵습니다. 국민의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동안 이 대표와 민주당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의문입니다.
민주당은 11월30일 오후 의원총회를 열어 선거법에 대한 의견을 들었습니다. 병립형 회귀 주장과 현행 준연동형 유지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11월30일 국회에서 본회의 전 열린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서 홍익표 원내대표가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 대표는 이틀 전인 11월28일 유튜브 방송에서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 있나. 현실의 엄혹함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마디 툭 던진 뒤 침묵하고 있습니다. 선거법 약속은 번복하고 싶은데 욕은 먹기 싫으니까 시간을 질질 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이럴 건지 궁금합니다. 당당하지 못한 처신입니다.
이 대표와 병립형 회귀를 주장하는 민주당 의원들에게 정치인의 약속에 관한 과거 사례를 하나 환기해드리겠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2년 대선에서 떨어지고 정계를 은퇴했습니다. 은퇴 성명의 마지막 대목은 “이제 저는 저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 생활로 돌아가겠습니다”였습니다.
그러나 1995년 지방선거가 끝난 뒤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신당 창당을 선언했습니다. 정계 은퇴 번복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하는 성명을 7월18일 발표했습니다.
“저는 지난 40년 동안 많은 시련을 무릅쓰고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평화 통일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이제 그 노력의 완성을 신당을 통해서 이룩하여 국민 여러분께 마지막 봉사를 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비판이 반드시 국민적 수용과 지지로 변화될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중략) 저는 지금 가장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국민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약속입니다. 정치인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국민 앞에 머리를 숙여 사과했습니다. 정계 은퇴 번복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지도 않았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과 거짓말을 한 것은 다릅니다. 처음부터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약속을 했다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거짓말쟁이는 정치인의 자격이 없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이 대표는 지난 6월 국회 연설에서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9월에는 체포동의안 부결을 호소했습니다. 스스로 국민에게 했던 약속을 뒤집은 것입니다.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번에 또다시 자신이 했던 정치개혁 약속을 뒤집으면 어떻게 될까요? 이제 더는 이 대표의 말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내년 총선 승리가 중요하다는 이 대표와 민주당 의원들의 말은 진심일 것입니다. ‘현실론’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인이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을 때는 사과하고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게 정치인의 바른 자세라고 봅니다. 그 사과를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국민입니다.
이 대표는 평소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 같지만 결국 국민이 하는 것”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이 대표와 민주당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