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6일 오후 대전 유성구에서 열린 ‘문재인 정권 탈원전 4년의 역설’ 만민토론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윤 전 총장이 쓴 마스크에 적힌 ‘탄소중심’ 오타가 화제가 됐다. 유튜브 새마을방송 갈무리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탄소중립’ 홍보에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6일 윤 전 총장은 대전 카이스트에서 원자력공학 전공 학생들과 간담회를 한 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돌아보는 토론회에 참석했을 때 주최 쪽이 배포한 마스크를 착용했습니다. 그가 쓴 마스크에는 ‘원자력’ 단어와 함께 ‘탄소중심’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습니다. 탄소중심은 ‘탄소중립’의 ‘오타’입니다. 출마선언문에 기후변화, 기후위기를 언급도 하지 않은 윤 전 총장이 역설적이게도 ‘탄소중립’을 널리 홍보하는 역할을 해낸 것입니다.
김상욱 교수 “고깃집에서 탄 돼지가 아니라 탄 소가 중심이란 것 아닐까?”
윤 전 총장이 마스크를 쓴 사진 한 장의 파장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알쓸범잡>, <선을 넘는 녀석들> 등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대중과 소통해 온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고깃집에서 탄 돼지가 아니라 탄 소가 중심이란 것 아닐까?”라고 적었습니다. 방송프로그램에서 “정치가 과학보다 상위”라고 말한 바 있는 김 교수는 정치적 결정으로 과학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해왔습니다. 김 교수가 공개적으로 발언한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 직속으로 한국 탄소저감 목표 설정과 이에 따른 정책을 마련하는 탄소중립위원회에 과학자들이 배제돼 있는 현실을 두고 과학자들의 부정적 평가가 있기도 한데,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한줄 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녹색연합 출신의 기후운동가이자 에너지전문가인 이유진 녹색전환연구소 연구원은 자신의 에스엔에스에 “원자력의, 원자력을 위한, 원자력에 의한 한국을 만드시려나…. 탄소중심 뭘까? 내 눈에는 원자력만 보여 이런 건가?
”라고 꼬집었습니다.
이미 시작된 대선 경쟁에서, 원전은 주요 쟁점으로 부상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를 방문하며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비판한 윤 전 총장은 월성원전 1호기 조기폐쇄 과정을 수사했습니다. 검찰 수사로 이어지게 한 데에는 감사원의 월성원전 1호기 조기폐쇄 과정 감사 결과 때문인데, 당시 감사를 지휘한 최재형 전 감사원장 또한 야권의 주요한 대선 후보이지요. 문 정부 ‘탈원전’ 정책을 비판해 온 원자력업계는 ‘소형모듈원전(SMR) 전도사’인 송영길 민주당 대표와 <조선일보> 등 든든한 우군도 이미 확보해두고 대선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후보군이 든든한 ‘친원전’ 인사라는 사실은 원자력업계와 대척점에 있는 기후운동가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환경운동가 출신 21대 국회 초선 정치인인 양이원영 의원은 단기 과외로는 채워지지 않는 철학의 한계를 꼬집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에스엔에스에 “에너지정책, 원전안전정책이 단기속성 과외한다고 이해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시는군요. (중략) 법전에 나와 있지 않은 세상을 좀 더 배우시라”고 올렸습니다.
과학자는 과학이 외면받는 현실에 탄식을, 기후운동가는 원전을 둘러싼 이념 논쟁 우려를, 정치인은 윤 전 총장의 환경 관련 철학이 부재한 것 아니냐는 근본적 질문을 남겼습니다.
윤 전 총장 쪽도 이런 평가에 억울할 수 있기는 해 보입니다. 바쁜 일정 중에 마스크에 적힌 오타를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높죠. 우리 모두 말을 못할 뿐이지 ‘탄소중립’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탄소배출량과 자연적·기술적 탄소흡수량을 합산해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든다’는 뜻을 바로 알아챈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윤 전 총장의 마스크 사진이 회자된 뒤 찾아보니 금융위원회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 ‘2021년 녹색금융 추진계획’ 이미지에도 ‘2050 탄소중심 추진전략을 뒷받침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탄소가 시소를 타는 모양인가?’
고백하건대 문과 출신인 기자도 처음 저 단어를 듣고 주변 눈치를 살폈던 것 같습니다. 나만 모르는 건가 싶어서. 하지만 다들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스쳤고, 곧 이어 이 어려운 문제를 쉽게 기사로 풀어 써나가야 한다는 부담이 컸습니다.
탄소중립을 모른다고 욕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문재인 대통령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일본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중국 시진핑 주석이 지난해 이후 수차례 ‘탄소중립’을 말하며 각종 정책을 내놓는 현실에서, 탄소중립에 관심을 갖는 것이 정치·경제 흐름을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때문에 오피니언 리더를 자청하는 이들이 탄소중립을 모른다고 하면 부끄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윤 전 총장의 경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고 선언했기에 (주최 쪽의 실수라 해도) 기후위기를 모르는 ‘기후문맹’ 이미지를 얻지는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아쉽게도 그리 좋지 않은 ‘한 컷’을 남겼습니다.
‘1.5도 낮추자’는 송영길도, 가덕도 신공항 추진한 이낙연도 있다
사실 윤 전 총장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최근에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산업화시대보다 평균 기온이 1.5도를 넘게 오르면 안된다’고 진단한 과학자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지구 온도를 ‘1.5도 낮추자’고 신박한 대안을 내놓은 송영길 민주당 대표도, 단거리 비행을 법으로 금지한 프랑스도 있는데 예비타당성조사도 면제한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위해 특별법을 밀어붙인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도 아직 기후위기라는 전 지구적 위기 앞에 어떤 정치를 할지 구체적으로 철학과 정책을 드러낸 적은 없습니다. 녹색연합은
지난 6일 윤 전 총장뿐 아니라 민주당의 8명 후보들 모두 기후위기 관련 구체적 공약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분석을 하기도 했죠. 이런 상황에서 스웨덴의 기후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와 함께 기후운동을 이끌고 있는 한국의 청소년기후행동은 툰베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아이 엠 그레타>를 보여줄테니 기후위기를 주요 정책 의제로 삼아달라는 ‘모두의 기후 정치’ 캠페인을 대선 주자들을 상대로 시작했습니다.
지난 3월 프랑스 하원에서는 기후변화 대응을 헌법 1조로 하는 안이 가결됐습니다. 지난 6일 한국에서도 환경재단을 중심으로 기후위기 대응을 헌법 1조에 담자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이제 시작인 한국 대선에서 기후위기는 얼마나 주요 의제로 부상할 수 있을까요. 윤 전 총장의 마스크 사진 한 장은 많은 질문을 하게 합니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