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공개홀에서 열린 <방송 3사 합동 초청> 2022 대선후보 토론에서 후보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의당 심상정 후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RE100? 유럽 뭐시기? 그딴 거 국민 90%가 모른다. 기자가 이런 글이나 쓰고 참 한심하네.”
20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주요 후보 4명의 방송 토론회가 열린 3일 늦은 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짧은 기후·에너지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이 후보가 기후·에너지 정책에 대해 윤 후보의 견해를 묻는 질문을 하자 윤 후보가 RE100(2050년 이전까지 100% 재생에너지 전기만 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업들의 캠페인)·유럽연합 택소노미(지속가능 금융 분류체계) 등 에너지 관련 용어를 다시 질문하는 모습이 여러차례 방송됐습니다.
이날 밤 <한겨레>는
<“RE100이 뭐죠? EU 뭐요?”…‘원전 전사’ 윤석열은 되물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적었습니다. 다른 언론들도 윤 후보가 되묻는 상황을 상세히 적었습니다.
기사 도입에 소개한 위 글은 기자에게 직접 메일을 보낸 한 독자의 의견이었습니다. 기사를 읽고 비슷한 댓글을 적은 독자들도 많았습니다. RE100이나 EU택소노미 용어가 워낙 전문적인 용어라 생소하기도 하고, 상대 후보에게 “모르겠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윤 후보의 모습이 대범해보이기도 합니다. 저 정도 몰라도 대통령 잘 할 수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각국 정부의 향후 5~10년의 기후·에너지 정책이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기후위기 시대’를 책임질 대통령 후보라면 이 정도의 용어는 알아야 한다는 탄식과 우려가 흘러나옵니다. 왜 일까요?
RE100 몰라도 돼? 먹고 사는 문제이자 새로운 무역 장벽
“RE100 선언한 전세계 349개 기업에 부품 납품하는 국내 기업들 어떻게 하라고….”
토론회가 끝난 뒤 양이원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페북에 글을 올렸습니다. 양이원영 의원의 말처럼, 애플, 구글, 나이키, 스타벅스 등 세계적인 기업들이 RE100을 선언한 것은 그들 기업의 자율적 결정이지만 파장은 전세계 기업 전반에 미칩니다.
쉽게 말해, 이들 기업이 앞으로는 재생에너지를 사용해 만든 제품이 아니면 자신들의 완제품에 사용되는 부품 혹은 원료 등을 수입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RE100이 확산되면서 재생에너지 사용 여부 자체가 무역장벽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지요. 탄소 감축 문제를 넘어 기업의 생존,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미래가 걸린 문제입니다.
이때문에 지난해 10월 한국전력공사 국정감사 증인으로 출석한 장성대 삼성전자 DS부문 지속가능경영사무국 전무는 “RE100과 탄소중립 선언 모두 적극 검토하겠다”고 답변했습니다. 세계적 흐름에 동참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기 때문에 탄소 감축이라는 ‘선의’가 아닌 ‘실익’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변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삼성도 알고 있는 것이지요.
윤 후보의 반응에 선생님처럼 바른 개념을 설명하는 데 그쳐 ‘잘난 체’했다는 평가를 받은 이 후보에 대한 아쉬움도 흘러나왔습니다. 기후위기 시대 기업들에게는 시급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는 RE100을 모른다는 것은, 국민의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경제발전과 산업경쟁력에서도 뒤쳐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고 역공할 기회였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지적입니다.
지상파 방송 3사가 공동주최한 대선후보토론회가 열린 3일 서울 KBS 스튜디오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 2022. 2. 3
‘원전 전사’가 택소노미 논쟁을 모른다는 의미
윤 후보가 원전에 진심인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친원전’은 원전을 점진적으로 줄여 2080년대 중반까지 ‘탈원전’에 도달하기로 한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 맞서는 정책입니다. 문 정부와의 차이, 그 선명성을 보이기 위해서 윤 후보 쪽은 이 에너지 정책을 주요 공약으로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윤 후보 캠프 내 에너지 정책을 주도하는 이 역시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입니다.
택소노미 또한 RE100처럼 어렵게 들리지만 원전에 진심인 대통령 후보라면 모르기 어려운 용어입니다. 어려운 개념일 수는 있어도 기후·에너지 분야에서는 산업계에 미칠 파장이 큰 뉴스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최근 2~3년 사이 새로 생겨난 개념으로, 전 세계 25개국이 자체적으로 만들고 있는 택소노미 기준의 최대 쟁점은 원전을 포함할지 였습니다. 한국 정부도 금융계, 환경부, 산업계 등이 지난 2년 동안 녹색 산업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지난해 12월 원전을 제외한 69개 세부 경제활동을 이에 포함시켜 확정했습니다. 이 택소노미에 따라 녹색채권 등 수십조원의 자산 투자 방향이 영향을 받습니다. 최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원전을 포함시킨 택소노미 최종안을 발의하면서 한국 정부의 택소노미에도 원전을 추가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견해가 전달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때문에 윤 후보가 ‘택소노미’ 용어 자체를 낯설어하는 모습은 원전 정책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의심으로도 이어집니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석탄화력발전이나 석유, 천연가스 등 탄소(온실가스)를 배출하는 화석연료를 줄이자는 사회적 합의가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줄어드는 화석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원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것이 재생에너지와 원전입니다. 각 정부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최선의 에너지를 찾아야 하는데 문재인 정부와 이재명 후보는 재생에너지를, 윤 후보는 원전을 내세우는 상황입니다.
이날 윤 후보는 “재생에너지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원론적 답변을 반복하며 문재인 정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했지만 진짜 맞붙을 쟁점은 따로 있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원자력업계에서조차 이날 토론이 원전의 친환경성이나 원전산업 지원 정책에 대한 방향과 철학 등 원전을 둘러싼 핵심 쟁점들에 대한 발전적 논의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윤 후보는 지난해 여름 주최쪽이 나눠주는 ‘탄소중심’ 마스크를 쓴 덕분에 문재인 정부가 강조한 ‘탄소중립’ 개념을 홍보하는 역할을 해냈습니다. 이번에는 RE100과 택소노미 등 어려운 기후변화 용어를 많은 시민들에게 또 한번 알리게 되었습니다.
생산적 토론이 이어지지 않고 ‘퀴즈’ 논란에 그친 것은 두 시간을 들여 후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시민들에게는 큰 손해입니다. 반면 지난해 11월 새로운 총리를 선출한 독일의 총선에 대해 외신들은 ‘기후 총선’으로 명명했습니다. 보수~진보 성향의 주요 6개 정당 모두 기후위기 대응을 주요 과제라고 했고, 이들 중 5개 정당이 재생에너지 확대에 찬성했습니다. 독일에서도 보수정당일수록 목표 시점과 설정 등 구체적 계획이 불분명하고 미래 과제로 남겨두었지만, 기본적으로 기후·에너지 공약 수준이 높았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대선을 맞아 각 정당들이 기후·에너지 공약을 발표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후보의 철학 등 심도깊은 논의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에 청년기후단체들은 지난달 20일 기후위기 공약만을 두고 각 후보들의 원포인트 토론회가 필요하다며 각 후보들의 토론회 참여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윤 후보 쪽이 불참 의사를 전하면서, 대선을 한 달여 남겨둔 현재로서는 성사가 불투명한 상황입니다.
토론회를 통해 윤 후보의 미진한 학습 상황을 목격한 기후단체 소속 한 청년은 “너무 수준이 낮다”라며 현 상황을 아쉬워했습니다.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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