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3일 한국 정부세종청사 교육부에서 열린 제2차 디지털게릴라 공개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대화형 챗GPT를 체험해보고 있다. 연합뉴스
“2022 개정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서 ‘성소수자’, ‘성평등’ ‘재생산권’ 표현을 포함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보다 포괄적이고 사회적 합의가 가능한 표현으로 반영되었습니다.”
교육부가 지난달 27일
유엔 인권이사회(HRC)에 보낸 답변서의 일부입니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대표적인 인권보호제도인 ‘특별절차’를 통해 1월 25일 한국 정부에 서한을 보냈습니다. 이 서한에서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성소수자 등의 표현이 빠진 것과 교육부가 그 이유로 ‘청소년들의 성 정체성에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점 등을 든 것에 대해
“국제 인권 규범에 명시된 교육권과 건강권을 위반한 것으로 보인다”며 “심각한 우려”를 표했습니다. 교육부의 답변서는 이런 우려에 대한 답변을 달라는 유엔 인권이사회의 요구에 따른 것입니다.
지난해 8월 30일 2022 개정 교육과정 첫 시안이 공개된 이후 12월 교육부가 최종 확정·고시하기까지 과정을 돌이켜보면 교육부의 답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우선 교육부는 ‘성소수자’ 표현을 포함하자는 ‘주장’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단순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부가 뽑은 정책 연구진이 마련한 첫 시안의 고등학교 ‘통합사회’ 과목 성취기준 해설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예시로 ‘성소수자’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장상윤 교육부 차관이 9일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에서 ‘2022 개정 교육과정’ 행정예고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물론 첫 시안이 ‘완성본’은 아닙니다. 특히 2022 개정 교육과정은 개발 과정에서 처음으로 국민참여소통채널을 여는 등 의견 수렴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지난해 9월 19일 교육부는 첫 시안에 대한 ‘국민 주요 의견’을 공개했는데 사회 과목에 대해선 “사회적 소수자 예시에서 성소수자를 삭제해달라”는 주장이 ‘주요 의견’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주요하다’고 판단한 근거나, 이를 뒷받침하는 데이터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타협할 수 없는 인권에 대한 범주들마저 교육부가 ‘국민 의견’이라는 이름으로 혐오적인 발언을 유통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교육부는 난장판이 된 공청회를 방관했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사회과 정책 연구진은 첫 시안에 이어 9월 30일 열린 공청회에서도 성소수자 표현을 유지했습니다. 공청회에 참여한
보수·종교단체 관계자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동성애 교육 반대” 구호를 외치며 욕설과 고성, 폭력으로 공청회 진행을 방해했습니다. 당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성명을 내고 “교과별 공청회가 파행을 겪을 때에도 공청회 운영 정상화에 나서야 할 교육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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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단상 뛰어올라 폭력 휘두른 보수단체…혐오 판 깔아준 교육부
지난해10월8일 충북 청주시 한국교원대 종합교육연수원 문화관에서 열린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 시안 공청회에서 최서현 전국특성화고노동조합 위원장이 연단에 올라 발언을 하는 도중 보수 단체 회원으로 보이는 남성이 난입해 최 위원장에게 달려들고 있다. 사진 전국특성화고노동조합 제공
지난해10월8일 한국교원대학교에서 교육부 주관 2022 개정 교육과정 총론 시안에 대한 공청회가 열린 가운데 일부 참석자들이 ‘동성애 옹호하는 교육과정을 철회하라’는 등의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교육부는 유엔 인권이사회에 보낸 답변서에서 성소수자 표현이 ‘삭제’된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으나 첫 시안과 공청회 시안에 포함돼 있던 성소수자 표현은 지난해 11월 9일 교육부가 발표한 2022 개정 교육과정 행정예고안에서 사라졌습니다. 또 도덕·보건과의 성평등, 재생산 표현도 사라졌습니다. 이를 두고 당시 교육부 관계자는 “역사과 교육과정의 ‘자유민주주의’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함께 사회과의 성소수자 표현은 교육부가 주도적으로 (관련 절차를 거쳐) 변경한 것이 맞다”고 밝혔습니다. 연구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훼손한 게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연구진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최대한 존중하지만 국민 의견과 교육부의 전체적인 판단과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조정했다”고 덧붙였습니다. 국민 의견과 더불어
교육부의 판단이 개입됐다고 직접 밝혀놓고도 유엔 인권이사회 답변서에 이런 내용은 담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11월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성소수자·성평등 표현을 삭제한 교육부 결정에 깊은 유감을 표명했지만, 이러한 우려는 2022 개정 교육과정에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인권위는 “특히 성소수자 용어의 삭제는 사실상 교육청 및 학교에서 성소수자 용어 사용 금지 및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의식의 심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교육부는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에 2022 개정 교육과정 심의를 맡기면서 이러한 우려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고 국교위는 심의 과정에서 보건 과목에 있던 ‘섹슈얼리티’까지 삭제하는 등 후퇴를 거듭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정말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말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까요? 교육부는 답변서에서 “이번 교육과정 개발 과정에 인권 차별적인 의도는 없었다”고 항변했습니다만,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오롯이 국민의 몫일 것입니다.
지난 6월 15일 교육부는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반도체 산업 생태계와 인재수요’를 주제로 토론회를 진행했다. 연합뉴스
이유진 김민제 기자
yj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