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교사의 인문 사회 비타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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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신분제 사회가 아닌 자유 민주주의 사회로,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존엄한 인격을 가진다. 따라서, 개인은 각자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권리를 지닌다. 오늘날과 같이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개발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진정한 ‘자아’를 성취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전통 윤리>(교육인적자원부) 242쪽
한 사회에서 전문가의 수는 소수이지만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대학 교수는 진리를 탐구하고 전문가를 양성하며, 의사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고, 법률가는 개인의 권리를 구제하며, 성직자는 인간의 영혼 문제를 다룬다. 그런데 이들은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일하기 때문에 비전문가는 이들이 전문 지식으로 환자나 의뢰인을 위해서 정직하게 일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소비자를 속였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사회는 전문가에게 다른 직종에 비해서 높은 사회적 지위와 안정된 소득의 기회를 줌으로써 자율적으로 수준 높은 직업 윤리를 지킬 것을 요구한다.―<시민 윤리>(교육인적자원부) 163쪽
■ 논제 찾아 생각하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데, 행복하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고 하지.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걸까? 산에 오르는 길도 여러 갈래가 있듯이, 행복에 오르는 잘 사는 길도 여러 갈래야. 그런데 여기서는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라는 길을 따라 행복이라는 산의 정상에 올라가 볼까 해. 인간의 본성 가운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노동의 역할이기 때문이지.
사람은 왜 일해야 할까? 대답은 간단해. 먹고살기 위해서야. ‘생존’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말이지. 인간이 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돼 있는지, 육체와 정신과 영혼으로 구성돼 있는지는 철학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문제야. 다만 한 가지 명백한 것은 모든 인간이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육체가 없는 영혼(disembodied soul)과 같은 존재는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이지. 그렇다고 육체가 정신이나 영혼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야. 다만, 모든 인간은 육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곧 ‘생존’을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는 거야. 우리가 일을 생업(生業)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 이러한 의미의 노동을 가리켜 우리는 ‘수단으로서의 노동’이라고 하지.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돼 전혀 일할 필요가 없는데도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있어. 재벌 집 아들도 일을 하고, 어떤 과학자는 아무런 경제적 보상이 없는데도 심혈을 기울여 실험을 하고, 등산가는 “그저 산이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른다”는 명제를 믿고 땀을 흘리며, 어떤 철학자는 인생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지. 이처럼 인간은 단지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고,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일하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지. 육체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욕구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야. 이러한 욕망의 충족이 바로 ‘자아 실현’이야. 유사 이래 인간에게는 ‘빵’과 ‘서커스’가 필요했어. 경제적인 이유가 빵이라면, 자아 실현은 오락으로 대표되는 서커스라고 할 수 있지. 농부는 벼를 심고 가꾸고 거두는 활동에서 단지 먹고 살 쌀을 얻을 뿐 아니라, 대자연의 섭리를 느끼고 자신이 흘린 땀방울의 의미를 확인하는 보람을 느껴. 마찬가지로 교사 역시 학생들을 가르침으로써 임금을 받고 생계를 꾸려 나가지만, 학생들의 해맑은 웃음 속에서 생명의 경이를 느끼고, 학생들의 성숙해 가는 몸짓이나 언어를 보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지. 이처럼 인간은 일하는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자신의 본질을 실현시켜. 말하자면 인간의 삶의 보람 자체가 바로 일에 있어. 이러한 의미의 노동을 가리켜 우리는 ‘목적으로서의 노동’이라고 불러. 그렇다면 생존과 자아 실현을 일의 필요 충분 조건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아. 위대한 사람들의 삶을 보면 민족과 사회, 인류를 위해 일신의 행복을 희생하기도 하지. 여기서 우리는 행복의 또 다른 조건, 아니 인간 본성의 또 다른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여 노동하는 동물일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서로 협력하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특징 말이야. 나를 나답게 해 준 조건들을 생각해 보면 이를 금방 알 수 있어. 나를 한 인간으로, 한 인격으로 길러 준 것, 현재도 나를 길러 주고, 앞으로도 나를 길러 줄 그 조건들을 떠올려 보면 나도 누군가에게 갚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거야.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논리는 여기에서 나와. 사회 봉사는 거창한 종교적, 도덕적 계율이 아니야.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성상 필연적으로 사회의 발전과 인류의 행복에 이바지해야 해. 그러니까 사람은 생계와 자아 실현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가족, 사회, 국가, 세계를 위하여 일해야 해. 이것을 가리켜 노동의 사회성(sociality)이라고 하지. 일이 이웃에 대한 봉사성, 사회에 대한 필요성, 국가와 인류에 대한 공헌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일하지 않는 ‘고급’ 거지들을 비난할 수 있겠어? 일이란 근본적으로 나와 남을 동시에 돕는 행위야. 생존, 자아 실현, 사회 봉사, 이 세 가지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한 일의 필요 충분 조건이지.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저자, 여수여고 교사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돼 전혀 일할 필요가 없는데도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있어. 재벌 집 아들도 일을 하고, 어떤 과학자는 아무런 경제적 보상이 없는데도 심혈을 기울여 실험을 하고, 등산가는 “그저 산이 있기 때문에 산에 오른다”는 명제를 믿고 땀을 흘리며, 어떤 철학자는 인생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지. 이처럼 인간은 단지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고,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일하는 것은 아니야. 그래서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지. 육체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욕구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야. 이러한 욕망의 충족이 바로 ‘자아 실현’이야. 유사 이래 인간에게는 ‘빵’과 ‘서커스’가 필요했어. 경제적인 이유가 빵이라면, 자아 실현은 오락으로 대표되는 서커스라고 할 수 있지. 농부는 벼를 심고 가꾸고 거두는 활동에서 단지 먹고 살 쌀을 얻을 뿐 아니라, 대자연의 섭리를 느끼고 자신이 흘린 땀방울의 의미를 확인하는 보람을 느껴. 마찬가지로 교사 역시 학생들을 가르침으로써 임금을 받고 생계를 꾸려 나가지만, 학생들의 해맑은 웃음 속에서 생명의 경이를 느끼고, 학생들의 성숙해 가는 몸짓이나 언어를 보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지. 이처럼 인간은 일하는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자신의 본질을 실현시켜. 말하자면 인간의 삶의 보람 자체가 바로 일에 있어. 이러한 의미의 노동을 가리켜 우리는 ‘목적으로서의 노동’이라고 불러. 그렇다면 생존과 자아 실현을 일의 필요 충분 조건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아. 위대한 사람들의 삶을 보면 민족과 사회, 인류를 위해 일신의 행복을 희생하기도 하지. 여기서 우리는 행복의 또 다른 조건, 아니 인간 본성의 또 다른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여 노동하는 동물일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서로 협력하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특징 말이야. 나를 나답게 해 준 조건들을 생각해 보면 이를 금방 알 수 있어. 나를 한 인간으로, 한 인격으로 길러 준 것, 현재도 나를 길러 주고, 앞으로도 나를 길러 줄 그 조건들을 떠올려 보면 나도 누군가에게 갚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거야.
박용성교사 여수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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