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말하기 수업’ 현실
우리 언어 생활의 70%는 말하기와 듣기가 차지한다. 국제듣기협회의 보고서에 나온 얘기다. 아이들도 ‘말하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2001년 고교 2학년 205명을 대상으로 한 논문의 조사결과를 보면 180명(87.8%)이 말하기 영역이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2008학년도 새 대입제도에서도 ‘말하기 능력’은 더욱 중요해졌다. 내신과 수능 이외에 우수 학생 선발을 위해 대학이 마련한 대학별 고사에서 구술고사가 큰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총 199개 대학 가운데 대학별고사로 면접이나 구술고사를 치르는 학교가 인문계열의 경우 73개교다. 44개 대학이 실시하는 논술고사보다 훨씬 많다. 서울대를 비롯한 30개 학교는 구술고사 반영비율이 20%가 넘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말하기 교육’이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01년 조사에서 말하기 지도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학생은 6.3%에 불과했다. 한 연구자가 2004년 중학교 3학년 교사 3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23명(62%)의 교사가 말하기 수업이 다른 영역에 비해 비중이 작거나 거의 없다고 답했다.
지난 11일 서울 송파구 문정동 1학년10반의 말하기 수업시간.
“그러니까 1번 너의 말은 남은 7명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사가 꼭 필요하다는 말이지?” “그래, 그래!”
‘그래그래’ 게임에 열중하는 아이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났다. 지구 종말의 날에 최후의 생존자 7명을 가리기 위해서다. ‘그래그래’ 게임은 4명이 모둠을 지어 1번 발언자가 한 말을 2번 발언자가 요약하고 내용이 맞다면 발언권을 갖는 ‘말하기 놀이’다. 이 학교 김지은 교사가 심리학의 집단 상담 프로그램을 국어 교과의 말하기 수업에 맞게 만들어 이번 학기 처음 적용했다. 김 교사는 “아이들이 말하고 듣는 태도를 개선하는 게 이 수업의 목표”라며 “캠코더로 촬영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은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게 된다”고 했다.
이처럼 최근 들어 말하기 수업을 강조하는 국어 교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등 다양한 국어 학습의 영역을 아우르지 못한다는 교사들의 자성이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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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술 평가보다 점수 낮아
- 학생 적극참여 기대 어려워
- 교사들 ‘말없는 수업’ 자성
- 심리상담 프로그램 활용
- 새로운 말하기 수업 ‘실험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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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이 특히 관심을 기울여 말하기 수업으로 개편한 활동은 ‘자기 소개 하기’다. 서울 강북구 신일중 조장희 교사는 자기 소개가 아닌 친구 소개를 통해 아이들의 말하기 훈련을 돕는다. 모둠을 짜 온종일 같이 놀게 한 뒤 보고서를 만드는 식으로 관계 속에 나타난 친구의 모습을 성찰하게 한다. 음식을 같이 만들어 먹는 것은 필수 과제다. 누구는 칼질하는 솜씨가 뛰어나고 누구는 설거지를 도맡아 했다는 등 서로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을 배치해 줌으로써 아이들에게 ‘말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이다. 조 교사는 “아이들이 앞에 나서서 말을 잘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 말할거리가 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며 “무엇이든 훌륭한 말하기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말하기 교육의 한 부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말하기 교육이 학교 현장에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김 교사는 “말하기 수업을 제대로 진행하려면 3주 이상 걸리는데 1주만 진행해도 아이들이 ‘우린 공부 언제하냐’고 묻는다”며 “학생이나 학부모는 여전히 읽고 쓰는 교사 주도의 수업이 아니면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우선 학생들이 ‘말하기 수업’을 ‘공부’의 일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특히 서울 지역은 올해부터 50%의 서술형 평가가 의무적으로 도입되면서 수행평가 비중이 이전보다 줄었다. 한달 내내 진행한 '자기 소개 하기'에 부여된 점수는 고작 15점, 독서활동 10점과 태도 5점을 더해 수행평가 비중은 전체의 30%다. 서술형 50%를 포함한 지필고사가 나머지 70%를 차지한다. 교사는 '말하고' 학생은 '듣는' 일방적인 수업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교사들은 교과의 특성을 고려치 않은 서술형 평가에 대한 일률적인 강제가 아쉽다.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 네 영역의 통합 교육이 필요한 국어 교과는 서술형 평가보다 수행 평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료교사들의 생각을 바꾸는 일도 과제다. 수행평가 과제는 학급마다 똑같이 부과돼야 하기 때문에 같은 학년을 맡은 동료 교사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같은 학교 권정혜 교사는 “교사들의 교육 철학에 따라 국어 교육을 보는 관점이 조금씩 다른데다 교사들로서는 ‘시끄러운’ 수업이 부담될 수 있다”고 했다. 학생들이 ‘말하는’ 것을 ‘떠드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교육적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005년 한국교육개발원이 전국의 중고교생 6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40.6%의 중.고생이 부모와 ‘전혀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가정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말하기 교육’에 대한 공교육의 다양한 관심과 투자가 필요함을 보여주는 역설적인 통계다.
떨리는 발표시간 마음 여러야 말문 트인다.
장 자크 상페의 책<얼굴 빨개지는 아이>의 삽화 한장면 열린책들 제공
서울의 ㄷ외고 국제반에 다니는 ㄱ군은 외국 유학 한번 안 갔다 온 ‘토종’이다. 나름대로 훌륭한 영어 실력을 자랑했지만 몇년씩 외국 생활을 하고 돌아온 친구들을 따라잡기는 역부족이었다. 모둠을 이뤄 과제를 수행할 때면 자기 때문에 점수가 깎일까봐 노심초사 잠 못 이루기 일쑤였다. 수업시간에 발표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 졌고 말수도 줄었다. 결국 ㄱ군은 스피치 학원을 찾았고 몇주간의 훈련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했다. 서울 강남에서 스피치 학원을 운영하는 양인석(46) 원장이 전한 얘기다.
심리적인 이유로 말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많다. 특히 발표 등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청소년들은 대개 자신감이 결여돼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양 원장은 “학생회장에 출마하거나 구술면접에 대비하기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말을 잘 못하는 학생들도 사설학원을 많이 찾는다”고 했다. 중학교 3학년 학생 69명을 대상으로 말하기 실태를 조사한 논문에 따르면, 14명(20%)의 학생이 발표력 부족의 원인으로 내성적 성격이나 소극적 생활자세를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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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표력부족, 자신감 줄었거나 내성적 성격 탓
- 심리장애인 경우도… 자기 드러내는 훈련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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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학생들에게는 낯선 사람을 만나 말할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 스피치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거리에서 만난 사람에게 서명을 받아오라고 시키거나 전철에서 큰소리로 말하도록 만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모와 자녀의 의지만 있다면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충분히 응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양 원장은 “현재 우리 사회에는 ‘말하기’만을 연습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전혀 없다”며 “연습할 수 있는 기회만 제공하면 말하기에 대한 자신감은 쉽게 향상된다”고 했다.
연습으로 치유되지 않는 말하기 관련 심리적 장애도 있다. ‘발표 불안’은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할 때 심장박동이 빨라지거나 호흡이 곤란해지는 등 신체적 변화가 수반되는 증상을 말한다. 발표가 예정된 며칠전부터 잠을 못 자거나 식사를 할 수 없을 정도라면 의심해 볼 수 있다. 발표 불안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3NLP센터의 유재춘 수석 트레이너는 “사춘기 청소년들에게는 발표 불안 증세가 자아 형성에 심각한 충격이 된다”며 “자퇴를 고려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의 학생들이 치료를 위해 방문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이런 경우 치료를 위한 전문적인 상담이 진행된다.
신경정신과를 찾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정 상황에서 말문이 막히는 ‘선택적 함구증’이나 대중 앞에 서서 말하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거나 기피하는 ‘사회공포증’이 대표적이다. 사회공포증은 대중 앞에 나설 때 부정적 평가를 예상해 긴장한다거나 창피당할 것을 두려워 해 생긴다. 15~6세가 최초 발병 시기로 보고되고 있어 사춘기 청소년들이 특히 유의해야 한다. 발표 불안도 사회공포증의 한 유형이다.
사회공포증은 직접적으로 말하기와 관련돼 있지는 않지만, 말하기를 통해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훈련을 함으로써 치료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다. 많은 스피치 학원이 사회공포증이나 발표 불안 등을 극복하는 훈련 프로그램을 두고 있는 이유다. 경기 분당 열린신경정신과 배경도 원장은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갖고 있다”며 “심각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하기 훈련을 통해 개선될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말하기 동아리’ 선배가 말하는 ‘말 잘하는 법’
‘말하기 훈련’은 말을 ‘할’ 사람과 ‘들을’ 사람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지속적인 연습을 위해 동아리 형태로 말하기 모임을 꾸리는 것도 좋다. 사진은 정기 모임 중인 서울대 말하기 동아리 ‘다담’의 회원들. ‘다담’ 제공.
“남 앞에 서는 게 두려웠어요. 중 3때였나. 문득 우리 사회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표현’을 잘해야겠더라고요.”
서울대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동아리 ‘다담’의 창립 회원 양현모(25)씨는 그때부터 스피치 학원에 다녔다. “거기서 뭔가를 배웠다기 보다는 강사들의 성공담 중에 내가 할 수 있는 말하기 방법을 찾을 수 있었죠.” 양 씨는 학원이 있었던 종로에서 집에 오는 전철 안에서 눈 딱 감고 ‘1분’ 동안 낯선 이들을 상대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중3 겨울방학 내내 그렇게 했더니 고등학생이 된 뒤로는 말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지 않게 됐어요. 물론 말하기 실력은 크게 늘지 않았지만요.” 국내 최초의 대학생 말하기 동아리 탄생의 배경에 숨어 있는 ‘말하기 공포 극복기’다.
초중고교에 발표수업이 늘어나고 입시제도에도 구술고사와 면접이 도입되면서 ‘말하기’ 훈련의 필요성을 느끼는 학생들이 많다. 반면 학생들이 말하기를 연습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친구들과 작은 말하기 동아리를 꾸려 언제 어떻게 있을지 모를 말하기 평가에 대비하는 것은 어떨까. 서울대 말하기 동아리 ‘다담’ 회원들이 그런 학생들을 위해 동아리 운영의 노하우를 공개했다.
말하기 동아리는 함께 할 사람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절반의 준비는 끝난다. ‘다담’의 회장을 맡고 있는 이기출(24)씨는 “말하기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피드백이 중요하다”며 “말할 수 있는 대상과 자신의 말하기에 대해 평가해 줄 수 있는 사람만 있으면 말하기는 충분히 연습할 수 있다”고 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데 자신감을 갖고 싶다면 동아리의 규모를 10명 내외로 유지하는 게 좋다. 소규모 토의나 토론으로 얻어질 수 없는 ‘대중 연설’ 능력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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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할 내용 외워 ‘3분 스피치’ 훈련
- ‘5분 발표’ 듣고 다시 요약발표 도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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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모였으면 말하기 능력을 기를 수 있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고안해야 한다. ‘다담’이 청소년들을 위해 제안한 방법은 3분 스피치와 오감만족 스피치다. 3분 스피치는 말하기의 효율성을 높이는 훈련이다. 말하기의 내용보다 말하기의 구성과 조직이 더 중요하므로 3분간 말할 내용을 원고에 적어오는 것을 금지하는 게 원칙이다.
오감만족 스피치는 5분 동안 특정 전문 분야에 대한 발표를 한 뒤에 들은 사람이 다시 재정리해 요약 발표 하는 형식이다. 복잡한 주제를 자신의 말로 풀어 남을 이해시키는 작업을 통해 말하기의 설명력을 높일 수 있다. 재정리해 발표하는 사람은 듣기 훈련이 되는 장점도 있다. ‘다담’에서는 자신의 전공 분야를 비전공자에게 설명하는 식으로 이뤄지지만 학생들은 문제집을 풀다 어려웠던 문제나 난해한 개념을 하나씩 맡아 자신의 말로 풀어 설명해 보는 것도 좋다.
따로 시간을 내 말하기 훈련을 할 수 없다면 친구들과의 등교 시간이나 점심 시간 등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 ‘다담’의 김수진(22)씨는 “친구들과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정해 놓고 읽은 후 느낌이나 생각을 친구들과 시간날 때마다 이야기하곤 했다”며 “수시 면접을 볼 때 교수님들 앞에서 긴장하지 않고 내 생각을 충분히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꾸준히 주제가 있는 말하기를 해온 덕분인 것 같다”고 했다. 김 씨는 토요일 자율학습이 끝난 후 공부하기 싫은 시간에 친구들과 작은 독서토론 모임을 가진 것도 큰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말하기’는 교사, 부모, 스피치 학원 강사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다. 이씨는 “중고교 시절에는 몰랐지만 대학에 오니 말하기 능력이 꼭 필요한 능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수학문제 한문제 더 푸는 것보다 말하기 연습을 하는 게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