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개원 당시 영보자애원 입구 모습. 서울사진아카이브
1983년 여름, 인천에 살고 있던 중학교 2학년 오충빈(51)씨의 어머니는 미용실에 출근한다며 집을 나갔다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하고 이모하고 경찰서랑 주변에 수소문하고 그랬어요. 몇 년 동안 그렇게 하다가 찾을 방법이 없어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았죠.”
2007년 오씨의 할머니가 사는 집으로 엽서 한장이 왔다. “(노숙인시설인) 영보자애원에서 우리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찾아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소름 돋고 놀랐지만 다행스럽고 고마웠어요.” 그러나 어머니가 실종 당시 무슨 상황이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오씨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서울역에서 누가 데려갔다고 하더라고요. 어머니가 (청각장애 등) 장애가 있긴 해도 글도 쓰고 일반적인 표현은 다 하시던 분이었어요. 과거에 왜 어머니가 끌려갔고, 왜 가족에게 돌려보낼 생각도 안 했는지, 국가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얼마만큼 짓밟았는지….” 오씨의 어머니는 3년 뒤 병으로 사망했다.
오씨와 지난 15일 기자회견에 나선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오씨의 어머니가 겪은 일을 ‘제2의 형제복지원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오씨의 어머니 이외에도 영보자애원 등 과거 부랑인시설로 운영되던 곳에 경찰과 공무원의 부랑자 단속으로 많은 이들이 강제로 입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오씨의 어머니는 실종 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한겨레>는 기자회견 당일 영보자애원 쪽에 오씨 어머니 관련 이야기를 들으려 연락을 취했으나 닿지 않았다. 다음날 영보자애원 쪽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기자회견을 전하는 기사는 쏟아졌지만 자신들에게 연락한 언론이 없었다며,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지난 18일 경기 용인에 위치한 서울시립영보자애원을 찾았다. 오씨 어머니의 기록물을 확인하고, 시설 관계자들의 말을 들었다. 1980년대 군사 정권이 사회를 옥죄었던 어두운 한국 현대사의 그림자가 이곳을 여전히 드리우고 있었다.
지난 18일 찾은 영보자애원 안의 한 건물. 이우연 기자
크고 작은 산에 둘러싸인 영보자애원은 3만3880㎡(1만249평)에 달하는 대지 위에 있다. 그중 중앙에 있는 ㅁ자 모양의 생활관에 입소자들이 살고 있었다. 입소자들은 장애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른 공간에 산다. 보통 4∼5명이 한 방에 생활하고 있다. 낮 12시께, 점심식사를 마치고 방에 있는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도 있었고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품에 인형을 꼭 쥔 채 이따금 인형을 바라보는 20대 여성도 보였다.
부랑인복지시설로 개원한 영보자애원의 역사는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거리의 갈 곳 없는 자들을 부랑인이라 칭하며 이들을 시설에 수용하는 내무부 훈령을 내렸다. 특히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0년대 초중반 경찰과 공무원은 ‘길거리 정화’ 명목으로 전국 거리에서 갈 곳 없어 보이는 이들을 부랑인시설에 보냈다. 부산에서는 형제복지원으로, 서울에서는 여성 부랑인의 경우 대방동 남부부녀보호소나 수서동 동부기술원으로 보내졌다. 그러던 중 1985년 서울시가 설립하고 천주교성모영보수녀회가 운영을 위탁받은 영보자애원이 개원했다. 부녀보호소에 있던 여성부랑인 800명이 영보자애원으로 옮겨졌다. 영보자애원은 2012년 노숙인요양시설로 전환돼 올해 11월 기준 330명이 지내고 있다. 현재 입소자 중 등록장애인의 비중은 80%다. 개원 이래 누적 입소자 수는 1885명으로 이중 약 47%가 이곳에서 지내다 숨을 거뒀다.
영보자애원에서 오씨 어머니와 관련한 기록물을 확인했다. 그 역시 1985년 부녀보호소에서 영보자애원으로 옮겨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오씨의 어머니는 1983년 9월, 알 수 없는 경위로 동부기술원에 입소했다가, 이후 청량리정신병원으로, 부녀보호소로 보내진 뒤 영보자애원으로 전원됐다. 부녀보호소에서 작성해 영보자애원으로 인계한 신상기록 카드에서 오씨 어머니의 주소와 최초 입소 경위를 찾을 수 없었다. 부녀보호소에서 영보자애원에 ‘부랑인’을 보내며 발송한 공문 3∼4장을 살펴보니 입소자 명단 옆 참고사항에 ‘지적장애’, ‘정신질환’ 등이 적혀져 있었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이들이 부랑인시설로 보내졌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대목이다.
영보자애원은 부녀보호소에 있던 이들이 영보자애원으로 옮겨온 것은 맞지만, 이들이 최초로 부랑인시설에 보내진 것은 영보자애원이 설립되기 이전에 벌어진 일이라고 밝혔다. 영보자애원 관계자는 “여성부랑인을 받은 이후 단 한 차례의 인권 침해나 비위 사실이 없음에도 영보자애원을 형제복지원과 동일한 프레임으로 싸잡는 것은 사실 왜곡”이라며 “물론 국가에 의한 불법적인 입소가 있었다면 명백한 인권침해이므로 영보자애원 역시 국가기관에서 사실 여부 등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입소자들의 연고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한계가 있었다고도 항변한다. 영보자애원은 오씨 어머니의 경우 여러 차례 이뤄진 면담에서 집 주소를 말하기 꺼려해 연고를 찾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영보자애원은 경찰과 함께 2004년 입소자들의 디엔에이(DNA)를 채취해 2006년 경찰청에 등록했는데 오씨 어머니도 이때 연고를 찾을 수 있었다. 이후 입소자 123명의 연고를 찾아 가족에게 보냈다고 영보자애원은 설명했다. 영보자애원은 현재 본인이 희망하는 경우 퇴소나 타 시설 전원이 가능하다고 밝힌다.
15일 오후 서울 중구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서울시립영보자애원에 입소된 사람들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입소 뒤에 인권침해가 있었는지, 영보자애원이 입소자들의 연고를 찾으려는 노력이 충분했는지 앞으로 조사를 통해 밝혀야 한다. 그러나 영보자애원 시설 하나만의 문제로 국한할 경우 국가의 책임이 은폐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공론화된 이후에도, 정부는 부랑인이라는 불분명한 정의로 시설로 보낸 이들을 적극적으로 찾지 않고 있다. 과거 부랑인시설에 들어온 이들의 입소 경위 등에 대한 파악도 부재하다. <한겨레>가 서윤기 서울시의원을 통해 입수한 ‘2017년 노숙인생활시설 인권실태 조사 결과보고’를 보면, 영보자애원 생활인 91명을 인터뷰한 민간조사원들은 이들 중 자진 입소자가 11명(12%)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고, 영보자애원의 입소 경위에 대해 ‘부적절’로 평가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이후 보건복지부에 올린 보고서에 입소 경위를 ‘부적절’이 아닌 ‘보통’으로 평가한 후, ‘대부분 오래전에 입소해 자기 결정에 따른 입소는 아니지만, 강제적이거나 대가성 입소는 없었음’이라며 인권침해와 관련해 특이사항이 없다고 보고했다. 서 의원은 “서울시는 조사를 시행했던 당시 기준으로 인권침해 사실이 없기 때문에 특이사항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고 전했다.
오씨는 자신의 어머니가 겪은 일에 대해 진실을 규명해달라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코로나19로 3년 주기로 실시되던 노숙인시설 실태조사를 중단한 서울시는 내년 영보자애원을 포함한 노숙인생활시설 인권실태 조사를 하겠다며 예산을 편성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조사가 진행될 수 있을까.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내무부 훈령에 의해 운영되던 36개 부랑인시설에 대한 전수조사를 요구해왔다.
이우연 기자
aza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