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언론인과 정치인 등의 통신자료를 수집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고발 사주 및 공소장 유출 등 검사·정치인·기자 등이 복잡하게 얽힌 사건의 성격상 통화 상대방 확인은 수사기법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기자·정치인 사찰’이라는 주장도 검찰과 경찰 등이 한해 수백만건씩 통신자료 수집을 하는 상황에 비춰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나 검찰개혁의 일환으로 인권친화적 수사를 천명하며 출범한 공수처가 편의를 이유로 수십년 간 이어온 수사관행을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이 언론·인권단체 등에서 커지고 있다.
공수처는 올해 들어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10여개 언론사 기자 수십명의 통신자료를 수집했다. <한겨레> 법조기자들도 최근 1인당 많게는 5차례나 공수처 수사2부·수사3부·수사과에 의해 통신자료가 수집됐다. 공수처 비판 보도를 한 <tv조선> 기자에 대해서는 법원 영장을 받아 통신사실확인자료도 확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수처는 현재 수사 대상이 기자들과 통화 빈도가 잦은 법조인과 정치인라는 점에서 ‘통상적인’ 통신자료 수집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이처럼 영장 없이 이뤄지는 통신자료 수집 관행은 최근 10여년 간 정보인권 차원에서 잦은 위헌 시비를 불렀다.
수사·정보기관은 필요에 따라 △통신자료 △통신사실확인자료를 수집하거나 △통신제한조치를 취한다. 통신자료는 유선·무선·인터넷 통신서비스 가입자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아이디, 서비스 가입·해지일을 말한다. 수사기관 등은 법원 허가 없이도 간단한 사유만 적어 이동통신사 등에 요청하면 이들 자료를 무제한적으로 받아낼 수 있다.
반면 통신사실확인자료는 통신자료보다 좀더 구체적 정보를 담고 있다. 통화 내용까지 엿볼 수는 없지만 통화·문자메시지 전송 일시, 통화시간, 발신기지국 위치 등을 알 수 있다. 통신비밀보호법 대상이라 법원 영장이 필요하다. 통신제한조치는 감청에 해당한다. 법원 영장을 받아 통화내용과 이메일 등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내란죄 등 중범죄에 대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요청 주체는 국가정보원인 경우가 많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서울중앙지검이 수집한 <한겨레> 법조팀 손현수 기자의 통신자료.
공수처 수사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주로 통신자료 수집이다. 수집 대상은 대부분 공수처와 검찰을 취재하는 기자들이다. 여기에 국민의힘 의원 일부도 통신자료 수집 대상이 됐다. 보통 수사기관은 수사 대상자(내사·피의자)의 통신사실확인자료를 법원 영장을 받아 확보한 뒤 수사 대상 기간 통화내역에 나오는 전화번호가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이동통신사에 이름·주소 등 통신자료 제공을 요청한다. 이를 통해 혐의 관련자로 의심되면 수사 대상자로 분류하고 그렇지 않은 단순 통화자면 수사에서 제외하게 된다.
공수처 역시 이런 방식으로 통신자료를 활용했을 뿐 언론인 등에 대한 사찰 목적은 없었다고 해명한다. 그러나 법조계에서는 수사력 논란에 시달리는 공수처가 새로운 수사 방식을 고민하기 보다 손쉬운 관행에 경도돼 있다고 지적한다. 수사 경험과 노하우가 부족하다보니 검찰과 경찰에서 즐겨쓰는 저인망식 통신자료 수집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것 아니냐는 것이다. 특별수사 경험이 많은 검찰 출신 변호사는 23일 “수사 과정에서 통신자료 수집 등은 불가피하다. 다만 수사 사안이나 대상에 따라 정치적 논란 등을 최소화하는 수사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데, 공수처는 이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 같다. 영장 없이 언론인과 정치인의 통신자료 등을 볼 때는 사찰 논란이 없도록 그 근거와 범위를 정밀하게 잡고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통신자료 수집 논란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회피연아’ 사건이 계기가 됐다. 당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회피연아’ 동영상을 올린 네티즌을 고소했는데, 서울종로경찰서는 네이버에 해당 네티즌 신상정보를 요청해 이를 넘겨받았다. 이에 법원이 발부한 영장도 없이 고객 정보를 수사기관에 넘겨준 네이버 행태가 도마에 올랐다. 법원은 네이버 잘못을 인정해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고, 이후 주요 포털사이트는 통신자료 임의제공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동통신사의 통신자료 임의제공은 중단되지 않았다. 법원 판단이 나오기 두달 전인 2012년 8월 헌법재판소는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른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제공 요청은 ‘임의수사’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동통신사 등이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제공 요청에 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 10년 가까이 이동통신사들은 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제공 요청에 100% 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정보인권단체 등은 지적한다.
실제 이동통신사 등 통신사업자들이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군 수사기관은 물론 사법경찰권을 가진 관세청, 법무부, 고용노동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에 임의제공한 통신자료 건수(전화번호 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2013년 957만4659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년에는 1296만7456건으로 정점을 찍은 뒤에도 2015년 1057만7079건, 2016년 827만2504건에 달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줄어드는 추세이긴 하지만 2017년 630만4985건, 2018년 614만1107, 2019년 602만8268건, 2020년 548만4917건 등 500만건 이상의 통신자료 조회가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2016년 1월7일 정보·수사기관이 수집한 통신자료. <한겨레> 기자 등은 그해 5월 헌법재판소에 통신자료 수집의 정당성을 묻는 헌법소원을 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 5월 검찰·경찰·국가정보원 등 정보·수사기관으로부터 저인망식 통신자료 수집을 당한
<한겨레> 기자 26명과 학생, 시민단체 활동가, 예술인 등 시민 500명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2016헌마388)을 제기했다. 당시 국정원 등은 <한겨레> 기자, 세월호 사건 유족, 야당 당직자, 민주노총 등에 대한 무차별적 통신자료 수집을 했는데, 여당이던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과 보수언론은 정보기관까지 나선 민간인 통신자료 수집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었다. 앞서 새누리당은 국정원 쪽 요구로 감청 등을 손쉽게 할 수 있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내기도 했다.
<한겨레> 기자 등이 낸 헌법소원 사건에 대해 헌재는 5년이 넘도록 결론을 내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가인권위원회는 2016년 12월 “통신자료 제공 제도는 개인정보 수집 목적과 대상자 범위가 지나치게 넓고, 사전 또는 사후에 사법적 통제가 이뤄지지 않으며, 자신의 개인정보 제공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통지 절차가 마련되지 않아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의견을 헌재에 낸 바 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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