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대선 사전투표를 하루 앞둔 3일 오전 사전투표소가 마련된 서울역 대합실 인근에 설치된 TV 화면에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단일화 기자회견이 중계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가 선거일을 엿새 앞둔 3일 전격적으로 후보 단일화를 선언하면서 이미 투표를 한 재외유권자들이 “무효표가 됐다”며 허탈해 하고 있다. 재외국민들의 투표권 보장을 위해 투표 뒤 후보 사퇴를 제한하는 일명 ‘안철수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국민청원도 올라왔다.
이날 미국 중부에 사는 이아무개(32)씨는 <한겨레>에 “투표를 하기 위해 16시간을 운전해서 갔다. 단일화 결정으로 본의 아니게 무효표를 행사하게 된 재외국민들이 허탈해할 마음에 공감이 된다”고 말했다.
국가마다 상황이 조금씩 다르지만 재외국민들은 이씨처럼 한표를 행사하기 위해 장거리를 운전하거나 비행기를 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캐나다에 사는 이아무개(29)씨는 “캐나다의 경우,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교통편이 여의치 않다. 하루 만에 투표를 끝내고 돌아가기 어려워 아예 투표를 끝내고 그 도시에서 하룻밤 자고 돌아오는 친구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재택근무가 불가능한 병원, 식당 등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휴가를 쓰고 투표를 하고 온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캐나다에 사는 재외국민 이아무개(29)씨가 지난 24일(현지 시각)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기 위해 밴쿠버 총영사관 재외투표소에 방문했다. 이씨 제공
투표소 거리가 멀지 않아도 재외국민에게 투표는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 뉴욕에 사는 ㄱ(26)씨는 “투표를 위해 미리 신청 기간을 확인하고 재외국민 투표 신청하고 승인 절차를 기다린다. 재외국민 투표날 맞춰 스케줄을 조정해 영사관이나 대사관을 직접 방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처럼 매체에서 정치 관련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동네에 홍보물이 붙어있는 것도 아니다. 투표할 후보를 결정하는 행위부터 신청, 투표까지 투표권을 행사하는데까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3일(현지시각) 오전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도 프리토리아 주재 한국대사관 1층 아리랑홀에 마련된 20대 대선 재외국민투표소에서 한 표를 행사하고 있다. 프리토리아/연합뉴스
그럼에도 이들에게 투표는 의미가 크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일체감을 느낄수 있기 때문이다. 새 정부의 외교 정책이 자신들의 생활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한다. ㄱ씨는 “재외국민들은 국격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에 ‘한 표’가 더욱 소중하다”고 말했다. 미국에 사는 이씨는 “미국에서도 저를 온전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어떤 대통령이 뽑혀 한국이 어떤 나라가 되는지에 따라 미국 사람들의 인식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더욱 신중한 마음으로 투표를 하고 온 것”이라고 말했다.
안철수 후보에게 투표한 재외국민의 허탈함은 더욱 크다. 베트남 북부에 거주하는 이아무개(30)씨는 “주6일 일하고 일주일에 쉬는 하루를 투표에 바쳤다. 양당제에 경각심을 주기 위해 주변에서 ‘안철수 찍으면 사표’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투표를 하고 왔는데 내가 지지한 후보가 내 표를 사표로 만든 셈이다”라고 말했다. 캐나다의 이씨는 “동네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사장님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해 영주권을 매번 갱신하는 수고를 하면서도 캐나다 시민권을 따지 않았다. 재정적으로 빠듯한데도 많은 돈을 써가며 안 후보를 뽑았는데 이번 단일화를 보고 ‘내가 신뢰했던 후보가 표를 홀랑 태워버렸다’고 화를 내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달 23일 해외 파병부대에서도 재외국민 투표가 실시된 가운데 이날 오만 청해부대 무스카트항 함상에 설치된 제20대 대통령선거 재외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방호복을 입고 투표에 참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들은 재외국민 투표권을 제도적으로 온전히 보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중국 베이징에 사는 김아무개(19)씨는 “주변에 한국인 학생 대부분이 수업 전 아침 일찍 일어나 투표를 하고 왔다. 단일화 기사를 보고 다들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해외에서 한국 국민으로서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장으로 향한 이들의 권리를 묵살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캐나다의 이씨도 “투표가 이미 시작된 뒤에 단일화를 하는 행동은 정치인으로서 책임감이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투표 시작 이후 사퇴를 금지하는 법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재외국민 투표 종료 이후 후보 사퇴를 제한하는 ‘안철수법’ 제정해 주세요”라는 글도 올라왔다. 작성자는 “투표를 다 끝낸 이후의 후보 사퇴로 인한 강제 무효표 처리는 그 표를 던진 국민들에 대한 모독이다. 이런 선례가 한 번 만들어지고 나면 다음 선거에도 재외국민 선거 진행 이후 급작스럽게 사퇴하는 경우가 생길 텐데 그렇게 되면 재외국민 투표자들이 안심하고 투표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어 “재외국민 투표자들의 진정한 투표권 보장을 위해서라도 후보 사퇴 기한을 재외국민 투표자 투표 이전으로 제한하는 ‘안철수법’을 제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제20대 대선은 재외유권자 22만6000여 명 가운데 16만1000여 명이 투표에 참여해 71.6% 투표율을 기록했다. 이번 재외투표는 지난 2월23~28일 사이 115개국의 219개 투표소에서 시행됐다.
이주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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