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2020년 3월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근본적 해결을 요구하며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활동 방향을 발표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지난달 <한겨레>가 ‘엔(n)번방의 일반인 가담자들’ 378명 1심 판결문을 전수분석해 보도하고, 보름 만인 지난 7일 대검찰청이 디지털 성착취 범죄의 구조적 원인인 수요 범죄도 무겁게 처벌하겠다는 업무지시를 내렸다. 디지털 성범죄 사건에 대해 고민하는 여성계와 법조계 전문가들은 “수요 범죄를 심각하게 인지하겠다”는 태도 변화를 환영했다. 그러면서 그간 사회적 약자의 범죄에 검찰의 눈길이 얼마나 닿았는지를 되돌아보고, 크게 신경쓰지 못했던 공판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제언도 함께 내놨다.
■ “소지범 구형 강화는 효과적인 사법부 압박 수단”
대검이 밝힌 ‘성착취물 소지범 엄정대응 방침’의 구체적인 내용은 △공판 과정에서 원칙적으로 징역형을 구형하고 △성범죄 치료 프로그램 등 수강·이수명령 등을 필수적으로 부가하고 △구체적인 구형 이유를 구두로 밝히며 △성착취물 삭제 차단 등 피해자 보호 지원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대검은 “그동안 제작·유포 등 공급 범죄에 주로 적용됐던 ‘강화된 사건처리 기준’을 수요 범죄에 대해서도 철저히 지켜 엄정대응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 변호사들은 대검의 방침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구형’은 검찰이 법원에 밝히는 처벌 의견이다. 구형을 강화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범죄의 중대성을 설득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엔번방 피해자를 대리했던 조은호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위원회 성착취대응팀)는 “검찰이 가벼운 구형을 하거나 구형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 않으면 재판부도 해당 사건을 일상적인 사건으로 인식하기 쉽다. 그런 점에서 구형 강화, 구형 이유 설명 방침은 검찰이 재판부를 압박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형해화된 공판기능’ 이제라도 강화해야”
그러나 구형 강화가 의미있는 수요 범죄 대응책이 되기 위해선 공판 기능 강화라는 전제 조건이 성취돼야 한다. 특수·공안 등 인지수사 부서를 중심으로 ‘줄세우기’하는 검찰 인사가 반복되면서, 그간 검찰 내부에서도 형사·공안 등 민생 범죄에 대응하는 역량을 개발하는데는 역량을 많이 투입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전문위원회에 참여했던 오지원 변호사는 구형 강화 조처가 진정 의미있는 ‘디지털 성범죄 엄정 대응’으로 이어지려면 검찰만이 수행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인 공판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짚었다. 그는 “그동안 검찰은 정치적 쟁점이 되는 사건의 수사에만 자원을 쏟아부었고 일반인이 피해자인 사건의 수사와 재판은 등한시했다. 성폭력 사건 재판에서 검사는 피해자를 대변해야 하고 양형과 관련해서 피해자의 사정을 알릴 의무도 갖지만, 이런 역할은 사실상 수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자 등 사건을 주로 맡아온 최정규 변호사도 “공판 업무에는 임용된지 얼마 안 된 저연차 검사들이 6개월에서 1년을 주기로 돌아가면서 투입되는 것이 현실이라 공판검사가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과거에 맡았던 한 사건에서는 증인신문에서 공소사실과 반대되는 증언이 나왔는데도 검사가 반대신문을 하지 않는 경우마저 있었다. 검찰이 민생사건 공소유지에 얼마나 의지가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던 대목”이라고 말했다.
■ “수사권 원상복구 알리바이 삼으면 안돼”
검찰은 디지털 성범죄 엄정대응 방침을 밝히며 경찰의 미진한 수사를 검찰이 보완한 사례를 들곤 한다. 9월 ‘수사·기소 분리 법안’이 시행되면 성범죄에 대한 체계적 대응이 어려울 수 있다고 강조하려는 취지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디지털 성범죄 엄정대응을 위한 노력을 빌미로 ‘수사권 조정’이라는 국가형사사법시스템의 조정에 맞서려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고도 지적했다.
조은호 변호사는 “(검찰이 사례로 들고 있는) 성폭력 사건에서 검찰의 보완수사 지시는 사실 매우 드문 일이다. 실제 엔번방 주범인 ‘와치맨’ 사건에서도 검찰은 와치맨을 음란사이트 운영 혐의로만 기소했다가 2020년 초 대대적인 언론 보도 이후에야 엔번방 관련 혐의를 추가했다. 보도 전에도 충분히 기소할 수 있었지만 검찰이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디지털 성폭력 사건에서 발생하는 형사절차상 문제점을 해결하는 시도를 하던 곳이 지난해 8월 출범한 법무부 디지털성범죄 전문위원회였는데, 이 위원회의 실무 팀장을 하던 서지현 검사를 갑자기 해임한 검찰이 과연 얼마나 디지털 성범죄 근절에 의지가 있는지도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디지털 성착취 범죄에 엄정 대응하겠다는 검찰의 의지가 엔번방처럼 극단적인 형태의 범죄뿐만 아니라 친밀한 사이에서 벌어지는 촬영·유포 범죄까지 닿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텔레그램 성착취와 스튜디오 촬영회 사건 등 최근 몇년 동안 사회문제로 떠올랐던 디지털 성폭력 범죄들은 오랫동안 계속됐지만, 성착취 구조를 드러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며 “당사자가 아니면 착취라는 사실을 알기 어려운 형태의 성폭력은 친밀한 관계 등에서 계속해 벌어지고 있다. 이 피해자들이 어떻게 거래되고 있는지 수사기관이 의지를 갖고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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