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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60여년 찾아헤매다 유골로 만난 형…동생은 열흘 뒤 눈을 감았다

등록 2023-03-09 12:00수정 2023-03-09 14:07

진실화해위, 형제복지원 피해자 조사하다
두달 전 요양원서 홀로 숨진 이접용씨 확인
지병없던 동생은 열흘 뒤 눈 감아
유족들, 형제의 삶과 죽음 되돌아봐
“할머니를 형과 만나게 해주려던거 아닐까”
고아원과 형제복지원 등 시설에 수용돼 있다가 지난해 7월 요양원에서 숨을 거둔 고 이접용씨와 그의 어머니 박순분씨, 이철용씨 모습. 이철용씨는 형 이접용씨의 납골당에 방문한 뒤 열흘이 지나 심정지로 생을 마감했고, 부산 영락공원에 있는 어머니 옆에서 영면했다. 가족들은 이접용씨의 생전 사진을 어머니 위패 아래 놓아 드렸다. 사진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고아원과 형제복지원 등 시설에 수용돼 있다가 지난해 7월 요양원에서 숨을 거둔 고 이접용씨와 그의 어머니 박순분씨, 이철용씨 모습. 이철용씨는 형 이접용씨의 납골당에 방문한 뒤 열흘이 지나 심정지로 생을 마감했고, 부산 영락공원에 있는 어머니 옆에서 영면했다. 가족들은 이접용씨의 생전 사진을 어머니 위패 아래 놓아 드렸다. 사진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너무 늦어 미안합니다.”

지난해 9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관이 형을 60여년간 찾아 헤맨 이철용씨를 만나 울먹이며 말했다. 10대에 집을 나간 형 이접용씨가 일흔다섯의 나이로 숨진 지 두달이 지난 뒤였다. 이씨는 “괜찮다.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게 됐으니 고맙다”고 조사관을 위로했다. 진실화해위가 형제복지원 피해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확인된 형의 납골당을 방문한 동생은 열흘 뒤 눈을 감았다. 가족들은 형제의 삶과 죽음을 기억한다.

8일 진실화해위와 유족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선천성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했던 형 이접용씨는 1950년대 후반 10대에 집을 나와 고아원에 들어간 뒤 일생 대부분을 수용 시설에서 보냈다. 1969년 21살 나이에 고아원을 나온 뒤 34살에 1982년 형제복지원에 입소했다. 1987년 이곳이 폐쇄될 때까지 5년을 형제원에 갇혀 있었다. 형제원이 문을 닫은 뒤에는 경남 진주시의 한 복지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만 33년을 살았다. 2020년 일흔을 넘긴 나이에 옮긴 창원의 한 요양원이 그의 마지막 거처가 됐다. 지난해 7월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한 이씨는 경남 창원에 있는 무연고자를 위한 봉안당에 유골이 안치됐다.

이접용씨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창원의 요양원에서 받은 이씨의 생전 사진. 가족들은 그가 돌아가신 어머니와 꼭 닮은 모습이라고 전했다. 사진 이씨 가족 제공
이접용씨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창원의 요양원에서 받은 이씨의 생전 사진. 가족들은 그가 돌아가신 어머니와 꼭 닮은 모습이라고 전했다. 사진 이씨 가족 제공
가족들은 접용씨가 집을 나간 직후 실종신고를 했고, 2016년에 실종선고를 받았다. 가족들은 접용씨가 살아 있었단 사실을 모른 채 제를 올렸다. 지난달 24일 부산 사하구에서 <한겨레>와 만난 동생 철용씨 아내 조경옥(73)씨는 “평생 잃어버린 큰아들을 찾다가 2006년 시어머니가 떠난 뒤로 아주버님 제사도 지냈다. 술을 드실 때마다 ‘접용이 얼굴을 봐야 하는데’라며 고개를 젓던 시어머니 생각이 아직도 난다”고 전했다.

조씨도 1976년 철용씨와 결혼한 뒤 30년 넘게 얼굴 모를 아주버님을 찾았다. 부산에 있는 고아원을 싹 알아보고, 형제복지원과 진주의 복지원까지도 찾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조씨는 이후 형제복지원 피해자 모임에 들어가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들었다. 장애가 있던 접용씨가 버티기엔 가혹한 환경이었다. 그가 살아있으리란 희망을 붙드는 일은 점점 힘들어졌다.

희망이 꺼질 때쯤 진실화해위 조사관의 연락을 받았다. 조사관은 형제복지원 피해자로 인정된 접용씨와 관련해 신상기록카드에서 본명과 비슷한 ‘이점용’이란 이름을 보고, 그의 시설 전원 과정을 살폈다. 생년월일도 틀린 채 새 호적이 만들어진 상태였다. 전원 과정을 보니 가족들이 이씨를 찾으며 파악했던 정보와도 부합했다.

경상남도 창원시 한 무연고자 봉안당에 모셔진 이접용씨 모습. 이씨는 ‘이점용’이란 이름으로 이중호적이 창설돼 각종 서류에 그의 흔적은 ‘이점용’으로 남아있다. 사진 이씨 가족 제공
경상남도 창원시 한 무연고자 봉안당에 모셔진 이접용씨 모습. 이씨는 ‘이점용’이란 이름으로 이중호적이 창설돼 각종 서류에 그의 흔적은 ‘이점용’으로 남아있다. 사진 이씨 가족 제공
뒤늦게 형의 죽음을 알게 된 철용씨는 지난 1월 무연고자 납골당에서 형을 만났다. 말없이 조용한 성격의 그는 비로소 “형, 내가 왔어요”라며 소리 내 울었다고 한다. 요양원 직원은 “이씨는 가족이 전혀 없다고 말씀해오셨는데, 무연고 장례를 치른 뒤 동생 연락을 받았다”며 “위절제술을 하고 편마비가 와 몸이 좋지 않았다. 병원에 계시다가 요양원으로 돌아온 뒤 어느 아침 조용히 운명하셨다”고 전했다.

동생은 납골당에서 형을 만나고 온 뒤 열흘째 되던 날인 지난 1월29일 숨을 거뒀다. 아무런 지병도 없던 그였다. 사인은 심정지. 갑작스레 장례를 치르게 된 조씨는 지금도 남편 죽음의 의미를 되묻는다. 가족들은 부산 영락공원에 모신 이씨의 어머니 위패 바로 옆에 철용씨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딸 연정(42)씨는 큰아들 접용씨를 오래 그렸을 할머니를 위해 이씨 사진을 위패 아래 붙였다. “할머니가 큰아버지(접용씨)를 많이 찾으러 다닌 걸 아니까, 할머니를 형과 만나게 해 주려고 열흘 만에 가신 게 아닐까….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가족은 그렇게, 죽음을 통과한 뒤에야 한 자리에서 만났다.

지난달 24일 부산 사하구 자택에서 <한겨레>와 만난 조경옥(73)씨. 조씨는 1976년 이철용씨와 결혼한 뒤 이접용씨를 찾아 나섰지만 끝내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사진 장예지 기자
지난달 24일 부산 사하구 자택에서 <한겨레>와 만난 조경옥(73)씨. 조씨는 1976년 이철용씨와 결혼한 뒤 이접용씨를 찾아 나섰지만 끝내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사진 장예지 기자
부산/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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