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급식실에서 아이들의 식사를 마련하던 노동자들이 지난 8일 분홍색 앞치마와 위생모 차림 그대로 국회를 기습 방문했다. 지난해 봄 12년 동안 학교 급식실에서 일한 조리 실무사가 폐암으로 숨진 뒤 산업재해를 인정받았지만 급식실 현장의 노동환경 개선은 요원한 까닭이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질병 산업재해 판단을 위한 역학조사 소요 기간이 최근 5년간 2배(221.8일→436.7일)로 늘었지만, 관련 기관(고용노동부·근로복지공단·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일과 질병의 의학적·과학적 증명’에만 매달리고 있다. 그새 질병 산재 신청자 111명이 역학조사 결과를 기다리다 사망했다.
전문가들은 개별 사건의 인과관계 규명에 치중하기보다 기존 조사 결과 등을 바탕으로 특정 업종·사업장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일부 질병에는 역학조사를 생략하고, 대신 예방 목적이나 특정 직종을 상대로 한 ‘기획성 역학조사’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역학조사 결과가 늦어지면 신청자와 유족은 ‘희망 고문’에 시달린다. 이는 불신과 분노로 이어진다. 산재 신청자와 유족의 절규를 감내해야 하는 연구원들의 정신적 고통도 상당하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이경은 선임연구원(예방의학 전문의)은 “조사 시점에 신청자가 사망했다는 말을 들으면 정신적 트라우마가 생긴다. 죄책감과 미안함 탓에 신청자가 꿈에 나오기도 한다 . 남겨진 분들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조사 의뢰 시점에 병세가 안 좋은 분들을 우선해서 조사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물론 역학조사가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 있다. 특정 직종에서 발생하는 질병과 작업 환경의 인과관계를 밝혀낼 경우 그 결과는 많은 노동자에게 적용된다. 근로복지공단 직업환경연구원의 김대호 업무관련성평가 부장(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은 “우리 연구원이 역학조사를 통해 세계 최초로 학교 급식소 조리원의 폐암이 산재임을 밝혔다. 역학조사 자체는 ‘보상을 위한 근거’이지만, 조사를 통해 직업병이 밝혀지면 다른 사업장에서도 예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전문 인력과 자원을 보강해 역학조사를 내실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예방 목적이나 신종 질병 등에 대한 기획성 역학조사가 그런 경우다. 이경은 선임연구원은 “예방 목적의 집단 역학조사가 활발히 이뤄지면 사업장 환경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 조사 결과가 쌓이면 산재 여부를 신속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산재 보험 적용 여부를 결정하는 개별 역학조사다. 전문가들은 역학조사를 과감하게 생략하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제안한다. 역학조사 경험이 있는 김부욱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연구교수는 “전문의 한두명을 충원한다고 해서 증가하는 역학조사 수요를 감당할 순 없다. 500건, 700건 밀려 있는데도 절차를 따르느라 사건처리가 지연되는 시스템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대호 부장도 “조사 의뢰를 받으면 문헌부터 찾아봐야 하고 신청자가 근무했던 현장에도 무조건 가도록 돼 있다. 현재 인력과 자원으로 (역학조사) 기간을 단축하는 건 무리”라며 “(질병 산재 승인 문제와 관련해) 전문가 의견에 대한 존중을 넘어 전문가 판단에만 의존하려는 ‘전문가주의’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인과관계 확인에 자원이 과도하게 투입되다 보니 사건 처리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올림 사무실에 놓인 ‘또 하나의 소녀’ 조각상.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2007년 3월6일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를 모델로 삼았다. 반올림 제공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추는 노동계와 경영계, 노동부 등 이해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는 것이다. 특정 사업장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직업병의 경우 역학조사를 생략하고도 산재를 인정하는 ‘추정의 원칙’을 대폭 확대하려면 ‘사회적 합의’가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유정옥 경기동부근로자건강센터 부센터장(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은 “노동계는 당연히 더 많은 (질병 산재) 인정을 원하고 경영계는 반대 입장이다. 노동부 장관은 먼 미래를 보고 정책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며 “학계가 먼저 나서서 역학조사를 생략하는 직종과 질병의 기준을 마련하고 자료가 축적되면 산재 인정 범위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법원도 산재 인정 때 업무와 재해 사이의 인과관계가 반드시 과학적으로 명백하게 입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해왔다. 2017년 8월 대법원은 삼성전자 엘시디(LCD) 공장에서 일하다 다발성경화증을 얻은 노동자의 요양불승인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패소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내며 ‘희귀질환 또는 새로운 질환과 직업 간 의학적·과학적 인과관계를 규명하기 어렵더라도, 인과관계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작업환경의 여러 유해물질이 존재하고 개별 유해 요인이 특정 질환의 발병 혹은 악화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사회보장제도인 산재보상보험법의 취지에 따라 법적·규범적 관점에서 보상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게 대법원 입장이다.
노동부 역시 2018년부터 추정의 원칙 적용 대상과 직종을 반도체·디스플레이 종사자의 직업성 암에서 탄광부·용접공·주물공의 8개 상병, 근골격계 질환 등으로 늘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는 세부 기준이 까다롭기 때문에 적용 사례가 많지 않다. 지난해의 경우 추정의 원칙으로 역학조사가 생략된 사건은 1466건으로 전체 질병 산재 신청 건수(2만8796건)의 5%에 그쳤다.
국회 생명안전포럼 대표의원을 맡고 있는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대법원은 이미 ‘사회적 인과관계’로 산재를 판단하라고 밝혔고 노동부도 이를 수용해 추정의 원칙을 적용했지만 역학조사 장기화 문제에서 보듯 변화가 별로 없다”며 “일하다 병에 걸린 노동자들에게만 유독 엄격하게 규제를 가하는 부조리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역학조사가 필요하다면 조사 기간을 최소화하도록 법제화하고 그 과정을 산재 신청인들에게 알려주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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