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상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상임대표의장이 지난 22일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사무실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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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73주년,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종전’이 아닌 ‘정전’, 정확히는 “최후적인 평화적 해결이 달성될 때까지 (교전 쌍방이) 한국에서의 적대행위와 일체 무장행동의 완전한 정지”(정전협정문)에 합의한 상태다. 한반도에서 치열한 교전은 멈췄지만 온전한 평화가 깃들지도 않았다. 언제든 국지적 무력충돌이 자칫 전면전으로 비화할 수 있는 군사적 긴장과 대치가 이어지고 있다.
인명 피해는 엄청났다. 국가기록원 자료를 보면, 한국군 62만여명을 포함해 교전국 군인만 약 281만명이 전사했다. 민간인 사망자도 남한에서만 99만명이 넘는다. 대다수는 대한민국 군경과 적대세력(북한군과 동조세력)의 학살로 숨졌다. 노무현 정부에서 제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5~2010년, 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기 전까지 민간인 희생자 유족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비극의 고통을 삭여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20년 12월 문재인 정부에서 제2기 위원회가 꾸려져 진실 규명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 22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이하 유족회)의 윤호상(76) 상임대표의장을 서울 강남구 봉은사로 사무실에서 만났다. 윤 대표는 만 세살이던 1950년 7월에,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뒤에는 좌우합작 운동을 하던 선친(윤윤기·당시 50)이 고향인 전남 보성에서 경찰에 체포된 뒤 처참하게 살해됐다고 했다.
―유족회 회원은 어떤 분들인가?
“첫째, 한국전쟁 당시 부모·조부모·친형제를 잃은 직계 유가족, 둘째는 인권과 평화에 대한 목적의식을 갖고 유족회 회칙에 동의하는 사람이다. 이 중 하나만 해당하면 회원 자격이 있다. 1961년 제4대 국회에 양민학살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15일간의 조사 신청 기간에 113만6천명가량이 신청했다. 그런데 60년이 흐른 지금은 채 2만명이 안 된다. 대부분 80~90대 고령이다. 진실 규명이 지연되면서 연로하신 분들이 계속 돌아가신다. 유족회원은 약 3천명(가구를 대표해 1명씩 가입) 정도다.
한국 군경에 의한 희생자가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보다 훨씬 많지만, 유족회는 양쪽 다 아우른다. 모두 국가 공권력에 희생되신 분들이다.”
―정전 70주년이 됐지만 민간인 학살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 해원 상생의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유족들은 2022년 정권이 바뀐 뒤 굉장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불과 1년 새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실책을 저지르고, 특히 국가 공권력에 희생된 학살이나 인권 침해 문제에서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유족들의 수명이 다하기만 바라는 것 같다. 박정희·전두환 시대보다 더 심한 상태로 가고 있다.”
―군사독재나 권위주의 정부 시절보다 더 열악하다는 뜻인가?
“윤석열 대통령이 제주 4·3과 광주 5·18 기념식에서 ‘상처받은 유족을 보듬겠다’고 한 것은 라이브 쇼였다. 그 뒤에 자기의 아바타인 김광동을 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후반기 위원장 자리에 앉혀놓고, 제주 4·3, 광주 5·18, 한국전쟁 피해자들의 정의 회복을 완전히 무력화해버렸다. 김광동 위원장(국민의힘 추천)은 앞서 1기 위원회가 인정한 역사적 사실들마저 부인하고 모욕적 발언을 일삼는다. 최근(6월9일)엔 군경의 학살 희생자 유족들을 두고 ‘군인과 경찰이 침략자에 맞서다가 초래한 피해를 국가가 보상을 해주는 나라가 세계 어디에 있느냐’고 했다. 그것도 극우 테러집단 서북청년단의 온상이던 영락교회 조찬 기도회에서. 지난 20일엔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관 출신을 (조사국장) 최종 합격자로 발표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2023년 6월7일 현재, 진실화해위 제1소위에 배당된 조사 신청은 1만6769건. 이 중 ‘한국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경에 의한) 불법적인 민간인 집단 사망·상해·실종’ 9946건(59.3%)과 ‘적대세력에 의한 인권유린·폭력·학살·의문사’ 3986건(23.8%)이 10건 중 8건 이상을 차지한다. 그런데 진실 규명이 된 사건은 적대세력에 의한 사건 중 522건(13.1%), 한국 군경이 가해자인 사건 중 338건(3.4%)에 그쳐 불균형이 크다.
“김광동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전임 정근식 위원장(더불어민주당 추천)에 이어 취임하기 전까지 진실화해위 제1소위원회 위원장이었다. 1소위는 항일 독립운동, 한국전쟁 전후 군경의 민간인 학살, 해방 직후부터 권위주의 통치 시기까지 적대세력의 테러·폭력·학살 등을 조사한다. 그런데 김광동 1소위원장은 군경에 의한 희생 사건 조사를 갖은 구실로 지연시켰다. 조사 개시 사건도 보고서에 꼬투리를 잡고 퇴짜를 놨다. 그가 진실화해위원장에 취임한 뒤인 지난 4월27일 유족 간담회에서 따졌더니 ‘속도를 내서 순차적으로 해결하겠다’고 했는데 진전이 없더라. 6월15일에 이옥남 1소위원장을 다시 만났는데, ‘부역 혐의자’와 ‘부역자’를 구분하고 있다는 거다. 그게 말이 되나. 결국 진실 규명을 하지 않겠다는 거다. 그날부터 유족회는 그동안 국회 앞에서 1105일째 해오던 ‘과거사법 개정 요구’ 1인시위를 잠정 중단하고, 진실화해위 앞에서 ‘김광동 퇴진’ 1인시위를 시작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실화해위의 근본 문제는 국가 범죄를 국가 기구가 조사한다는 거다. 국회 집권당과 야당이 위원 추천을 독점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현행 방식에선 누가 위원장을 하든 정권의 향방에 따라 과거사가 바뀌어버린다. 조사위원들도 국방부·국정원 등 정부 부처의 파견 공무원이 30%다. 진실화해위는 명실상부한 독립성과 강력한 조사권을 보장받는 민간 기구로 꾸리고 국내외 전문가들을 모셔야 한다. 전례도 있다.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혐의자 체포권을 포함해 조사권이 강력했다.”
―현실적으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지금 유족회원들은 체념과 포기 상태다. 오죽하면 윤석열 정권 퇴진하라고 외치겠나. 유족회가 요구하는 과거사법 개정안의 핵심은 조사 기간(현행법으로는 내년 5월에 끝나고 필요한 경우 1년 연장 가능) 연장과 배·보상 심의위원회 구성이다. 현재 국회 계류 중인 개정안만 11개나 되는데, 입법 절차가 하세월이다. 이것만 돼도 많이 달라질 수 있다. 유족들에게 한국전쟁은 묻고 넘어갈 과거사가 아니라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일어난 현대사, 지금도 진행 중인 역사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