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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영상] 어머니·누나 핏물 엉켜 살아남은 아이…참혹한 빈곤 수렁에

등록 2023-09-21 10:00수정 2023-09-21 13:50

[베트남전 파병, 60년의 기억]
빈호아 학살 이후 가족을 잃은 도안쭈옌이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곽진산 기자
빈호아 학살 이후 가족을 잃은 도안쭈옌이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곽진산 기자

“그 탁한 물이 내 몸에서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않았습니다.”

1966년 12월, 당시 돌도 지나지 않은 도안쭈옌(58)을 검붉은 진흙 속에서 꺼낸 건 아버지였다. 한국군은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비는 도안쭈옌 가족과 주민들에게 끝내 총격을 가했다. 총격 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차가운 논으로 고꾸라졌다. 마르지 않았던 논의 물은 피와 함께 물들었고, 도안쭈옌은 그 탁한 물을 마셔야 했다.

유격대였던 아버지는 이튿날 뒤늦게 돌아와 도안쭈옌을 진흙 속에서 꺼냈다. 다행히 숨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누나, 친할머니가 죽었다. 도안쭈옌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아버지는 가족의 주검을 묻은 뒤 또 그의 곁을 떠났다.

한국에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됐던 시기인 2000년에 비로소 전기가 들어올 만큼 빈호아는 가난한 농촌 마을이었다. 가장이었던 남성들은 유격대 활동을 하러 마을을 떠나고, 생계 최전선에 있던 여성들이 학살로 숨진 탓에 살아남은 아이들은 생존 이후에도 계속해서 가난과 싸워야 했다.

“외할머니가 쌀장사하면서 내가 결혼할 때까지 나를 키웠다. 할머니는 귀가 좋지 않아 장사도 어려웠다. 외삼촌들도 있었지만, 혁명 활동 중이라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도안쭈옌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학살 이후 삶은 녹록지 않았고, 삶은 늘 불안했다.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한국을 더 증오했던 것 같다. 이제 한국에 원한은 없다. 다만 학살로 잃었던 상실이 너무 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베트남 전쟁과 학살은 그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갔지만, 그는 정부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못했다. 학살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몇년 전 한 베트남 민간 업체로부터 후원금 100만동(한화 5만원)을 학살 위로금으로 받은 게 전부였다.

빈호아 학살 생존자 도안년(왼쪽), 도안응이아 형제. 도안응이아는 탄약이 섞인 빗물 때문에 시각을 잃었다. 곽진산 기자
빈호아 학살 생존자 도안년(왼쪽), 도안응이아 형제. 도안응이아는 탄약이 섞인 빗물 때문에 시각을 잃었다. 곽진산 기자

도안년(62) 역시 빈호아 학살로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를 잃었다. 도안년은 총격 당시 머리를 다쳤다. 어머니 품속에서 극적으로 생존한 동생 도안응이아(57)는 빗물에 섞인 탄약 때문에 눈이 멀었다. 아버지는 유격대 활동으로 고향을 떠나 있었고, 남은 생존자들은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왔다. 형제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세운 가족들의 무덤은 잡초들로 무성했다. 도안년은 잡초 사이에 노란 국화 뭉치를 심었다. 벅차지만 살아가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었다.

빈호아 학살 생존자 도안년, 도안응이아 형제 가족의 무덤 묘비. 묘비에는 ‘Dai Han’(한국군)이라 적혀 있다. 고경태 기자
빈호아 학살 생존자 도안년, 도안응이아 형제 가족의 무덤 묘비. 묘비에는 ‘Dai Han’(한국군)이라 적혀 있다. 고경태 기자

학살 상황을 덤덤히 설명하던 또 다른 생존자 응우옌타인뚜언(65)은 ‘학살 이후 어떻게 사셨냐’는 물음에 갑자기 말을 멈췄다. 학살로 어머니와 동생이 죽었고, 떠나 있던 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족 중에 혼자만 살아남았다. 응우옌타인뚜언에겐 참상의 기억보다 그 이후의 삶이 더욱 힘겨웠다.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다”고 입을 뗀 응우옌타인뚜언은 복받친 듯 눈시울을 붉혔다. “안정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마을에 살아남았던 아줌마와 같이 그냥 어울려 살았다. 군인들이 어디서 전투를 하면 그곳을 피하고, 여기저기 옮기면서 살아야 했다.” 응우옌타인뚜언은 ‘땅 위에서’ 살지 못하고 한 줌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방공호를 전전하며 생계를 꾸렸다.

베트남 해방 뒤 응우옌타인뚜언은 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돈이 없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바로 돈벌이에 뛰어들었다. 응우옌타인뚜언은 “나는 일찍부터 어머니 손 없이 스스로 먹는 것, 자는 것, 옷 입는 것까지 챙겨야 했다. 그땐 어려서 이런 것들이 상실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다”며 “크면 클수록 어머니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제 그에게도 한국에 대한 원한은 없다. 다만 과거에 대한 반성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이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그게 마지막 소원이다.”

응우옌타인뚜언이 지난 4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던 중 과거를 회상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곽진산 기자
응우옌타인뚜언이 지난 4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던 중 과거를 회상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곽진산 기자

빈호아(꽝응아이성)/곽진산 기자 kjs@hani.co.kr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통역 응우옌응옥뚜옌(다낭대 한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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