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원내대책회의에 유의동 정책위의장(앞줄 오른쪽)이 윤재옥 원내대표(앞줄 왼쪽) 등 당 관계자들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유 의장은 이 회의에서 연금개혁 구조개혁안을 제시했다. 연합뉴스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연금개혁을 둘러싸고 윤석열 정부와 여당이 지금껏 보여준 행태를 한마디로 압축하면 기괴함이다. 윤 대통령이 지난 5월 말 사회보장전략회의에서 보여준 발언의 기괴함이 연금개혁 과정에서 정부·여당까지 전이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1988년 국민연금 제도 도입 이래 한국 연금정치사에서 이런 적은 있었던가? 말로는 여전히 개혁 완수를 운운하지만, ‘개혁 회피, 비난 회피의 연금 정치’의 끝판왕이 아닐까 싶다.
최근 잇따라 전개된 좌충우돌식 행태는 ‘악성의 연금정치 3종 세트’다. 첫째는 ‘맹탕’이다. “구체안을 내겠다”고 공언해온 보건복지부가 윤 대통령의 승인을 거쳐 국회에 제출한 연금개혁안(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은 재정계산이란 취지의 기본 요건조차 갖추지 못했다. 국민연금법에 의무화한 재정계산은 본디 “장래의 수지를 전망해 그 결과에 기초해 재정 확보 및 제도 개편 계획을 세우”라는 게 핵심이다. 이번처럼 구체적 숫자 없이 방향성만을 제시하라는 게 아니다. 법적 책임을 방기하고 결정을 국회로 떠넘겼다는 비판이 나오는 근거이며, 윤 정부 친화 성향을 보여온 뭇 언론과 전문가들조차 맹비난을 쏟아낸 이유다. 정부로부터 바람 빠진 공을 넘겨받은 국회는 스스로 개혁의 바람을 채울 자신이 없다면, 이참에 정부안을 반려해, 정부가 최소한의 법적 책임을 지키도록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3종 세트의 두번째 양태는 ‘막던지기’다. 어처구니없게도 누구보다 냉정해야 할 행정부가 앞장서 불붙였다. 맹탕 안을 낸 데 따른 비난을 의식해 급발진한 모양새다. ‘세대별 보험료율 인상 속도 차등화, 자동안정화장치 도입, 확정기여 방식으로의 전환’ 등 하나하나 많은 검토와 숙의가 필요한 제도개편 방안을 너무나 가볍게 정부안에 담았다. 더욱이 연금개혁의 구체안 마련을 위해 꾸려진 정부 자문기구인 재정계산위원회에서도, 여야가 참여해 구조개혁을 논의해온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에서도 단 한차례도 논의를 한 적 없는 방안이다. 이들 안은 정부가 그토록 강조한 세대 상생의 연금개혁 논의가 아니라 오히려 세대 갈등을 불러일으키거나 개혁 방향의 혼돈을 가져올 조짐이다. 여당은 한술 더 떴다. 내내 잠자코 있다가 느닷없이 연금제도의 틀을 통째로 바꾸는 초급진적 구조개혁안을 제시했다. 지난 31일 열린 여당 원내대책회의에서 유의동 정책위의장은 “부과식에서 적립식으로 운용 방식을 단계적으로 전환하자”, “기초연금을 국민연금과 연계해 점진적으로 통합하자”는 어마어마한 연금개혁 방향을 제안한 것이다. 유 의장의 발언은 전문가들조차 내용 파악이 다를 정도로 모호했다. 이 때문에 한 경제신문이 “적립식에서 부과식으로 전환을 추진한다”라며 발언을 거꾸로 보도하기도 했다. 이들 방안 역시 앞에서 언급한 정부와 국회의 두 기구에서 단 한차례도 논의한 적이 없었다. 물론 국민의힘 내부에서조차 논의해온 흔적 또한 찾을 수 없다.
발언 시점도 공교롭다. 그의 발언은 윤 대통령이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한 그날 아침 회의에서 나왔다. 이 때문에 연금 전문가들은 유 의장의 발언을 두고서 모호함과 시점 등 다분히 의도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감추지 않는다. 맹탕 연금개혁안을 두고 대통령에게 쏟아질 비난을 회피하기 위한 발언이 아니냐는 것이다. 정부·여당의 세번째 연금정치의 코드는 바로 개혁 회피란 비난을 피하기 위한 ‘물타기’다.
전문가들은 3대 사회개혁 중 하나로 연금개혁의 깃발을 드높이던 윤석열 정부와 여당이 보이는 이런 ‘개혁 회피, 비난 회피적 행태’는 다가오는 총선을 의식한 표 계산 때문으로 추론한다. 표를 의식해 찬반양론이 뜨거운 구체안 제시를 회피하거나 청년 세대의 정서에 맞추고자 한 데 따른 결과란 분석이다. 하긴 문재인 정부도 표를 의식한 끝에 연금개혁에 끝내 실패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윤 정부와 여당의 연금정치 행태는 어느 정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연금정치 비난 회피 전략이란 일반 해석에 그칠 수 없는 중대한 악성이 내장돼 있다. 정부와 여당이 내던진 급발진 방안들은 현실화 여부를 떠나 그 가리키는 방향이 대체로 세대 간 집단부양이란 연금의 공적 성격을 더욱 위축시키고, 민간보험이나 저축 같은 사적 성격을 강화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정부·여당은 이들 안이 장차 청년 세대를 위한 구조개혁 방안이라고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그렇지 않거나 오히려 더 불리한 대목도 적잖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무엇보다 이들 방안은 가뜩이나 빈약한 연금 급여율을 더 낮추게 하는 방향이란 점에서 우려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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