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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강제동원 ‘필사적 취재’…기밀 몰래 빼오기도

등록 2010-03-10 08:51수정 2010-03-10 10:29

하야시 에이다이가 조선인 소년광부들의 단체촬영 사진을 들고 탄광노동 실태를 설명하고 있다.
하야시 에이다이가 조선인 소년광부들의 단체촬영 사진을 들고 탄광노동 실태를 설명하고 있다.
일제징용 르포작가 하야시
탈주 조선인 돕던 아버지 영향
광산현장 체험위해 대학 자퇴
노무과장·순사까지 찾아 취재
`지쿠호갱부무덤’ 등 50권 펴내
일제의 강제동원 피해 상황을 추적하는 한국인이 그의 이름을 모른다고 하면, 아직 초보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을지 모른다. 하야시 에이다이(77), 직업은 다큐성 르포를 쓰는 작가다. 그가 쓰거나 편집한 책은 50여권에 이른다. 주제도 징용으로 탄광에 끌려간 조선인, 자살특공대, 군대위안부, 이중징용, 시베리아 억류자, 사할린에서의 조선인 학살 등 아주 다양하다. 저서의 제목과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신문 한 면이 모자랄 정도다.

 그의 장기는 끈질긴 취재다.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 편에 섰던 사람, 뭔가 감추려는 사람들을 수십 번이라도 찾아가 입을 열게 만든다. 강제연행에 관한 자료 수집도 마찬가지다. 통상적 접근으로 아무런 결실이 없을 경우, 도덕적으로 시비 소지가 있는 방식을 피하지 않았다.

지난 1월19일 오후 후쿠오카현 다가와시에 있는 작업실로 그를 찾아갔다. 수년 전부터 폐 질환을 앓고 있는데도 집필의 손을 내려놓지 않고 있었다. 서재의 들보에는 앞으로 쓸 책의 제목을 적어놓은 종이들이 걸려 있었다. 그는 병마와 싸우는 환자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괄괄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다작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일반 기자와 달리 한 가지 주제를 잡으면 10년이 걸리더라도 파고든다는 그의 입에서 ‘철저하게’ ‘필사적으로’ 취재한다는 말이 끊임없이 나왔다.

 -오래 전부터 만나고 싶었지만 병중이라는 말을 들어 인터뷰 신청을 주저했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

 “아니다. 아침에도 병원에 가 산소 흡입을 했다. 왼쪽 폐가 거의 기능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전보다 조금 나아진 편이다.”

 -수십년 전부터 조선인 강제연행에 관한 책을 써왔는데 무슨 사연이 있었나?

 “태어나 자란 곳이 다가와시에서 8㎞ 정도 떨어진 가와라마치라는 산지다. 어렸을 때부터 지쿠호 탄전지대에 끌려왔다 도망치는 조선인들을 봤다. 탄광에서 탈주한 조선인들이 열차를 타고 가면 역에서 다 잡혔다. 일본어를 하지 못하거나 억양이 이상했기 때문에 바로 주재소로 연락이 갔다. 나의 고향은 조선인들이 철도를 벗어나서 산길을 타는 도주경로에 있었다. 노무관리자나 순사에게 잡힌 조선인은 그 자리에서 반쯤 죽을 정도로 두드려 맞았다. 도망친 조선인들은 옷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옷 색깔이 미쓰이탄광계는 곤색이었고 미쓰비시는 남색이었다. 가슴 왼쪽에는 강제연행 때의 일련번호를 달고 있었다. 탈주가 끊이지 않자 1942년께 마을 촌장이, 수상한 조선인이 나타나면 주재소로 연락하라는 회람판을 집집마다 돌린 기억이 난다.”

 -부친이 조선인들을 돕다가 고초를 겪었다고 하던데.


 “아버지는 일본이 러시아혁명에 간섭하기 위해 미국 영국 등과 함께 시베리아에 파병을 했던 1918년 8월에 고쿠라(현재 기타규슈시에 편입) 연대의 사병이었다. 그 무렵 ‘쌀 소동’(일본 정부가 시베리아 출병을 한다며 쌀 구매에 나서고 상인들이 매점매석을 하면서 쌀값이 폭등하자 일본 전역으로 퍼진 민중 폭동)이 벌어졌다. 모지항에서 승선을 기다리고 있는데 중대장이 지쿠호에 소동이 벌어졌으니 지쿠호 출신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지쿠호 출신은 다시 고쿠라로 돌아가고 남은 병력이 파견돼 진압을 했다. 당시 야마구치현 우베시에는 사상자가 수십명 발생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사태가 진정되고 나서 고쿠라연대는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는데 아버지는 군대가 국민을 사살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년 쯤 지나서 아버지는 시베리아에서 반군 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돼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상등병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돼 하바로프스크부대의 중영창에서 심한 동상에 걸렸다. 나중에 풀려나 원대 복귀를 했는데 휴일에 연해주의 조선인 마을에 들렸다가 할머니들이 김치를 발라줘 동상이 나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조선어를 배웠다. 러시아어도 했고 귀국해서는 에스페란토어를 배우기도 했다.”

 -부친이 특별고등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는데, 경위는 무엇인가?

 “나의 집안은 신사의 의식을 집전하는 신관을 대대로 해왔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밥과 정수를 들고 신사에 참배를 했다. 후계자 수업을 시킨다고 나를 데리고 갔다. 신관은 마을의 행사를 주관하기 때문에 주민들의 존경을 받는 자리다. 마을에서 영장을 받아 입대하는 군인이 있으면 신사에서 출정군인 기원제를 반드시 했다. 신관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이 모두 모여 ‘무운장구’를 빌었다. 소학교 전교생이 꽃을 들고 군가를 부르며 행진을 하고 국방부인회 소속 여자들도 참석했다.

 43년 4월 초 기원제 자리에서 촌장이 천황을 위해 반드시 목숨을 바치고 오라는 인사말을 했다. 하지만 반전 평화주의 사상을 가진 아버지는 ‘반드시 고향의 처자에게 돌아와라, 결코 헛된 죽음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했다. 그 자리에 순사도 있었다. 그날 밤 아버지가 경찰서 특고로 연행됐다. 어머니가 소학교 4학년이던 나를 데리고 주재소에 가 어찌된 영문이냐고 물었더니 ‘사상이 나쁘다’ 는 말을 들었다. 내 생각에는 아버지가 숨겨주고 도피시킨 조선인이 3백~4백명에 이르는데 결국 그것이 발각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예로부터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은 신사나 사찰의 마루 밑에서 하루 밤을 보내곤 했다. 조선인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때는 신사에 20명이 있을 때도 있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주먹밥과 갈아입을 옷을 주고 조선말로 도피방법을 알려주었다.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관부연락선을 타러 시노모세키나 하카타 쪽으로 가면 대체로 잡혔기 때문에 일본에 연고자가 있으면 그리 가도록 주선했다. 조선인들이 잡히면 경찰이 도주경로를 조사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행동이 드러났던 것 같다.”

 -부친은 어떻게 됐나?

 “마을에 신관이 없으면 무운장구를 비는 식전을 하지 못하는 곤란한 일이 발생한다. 촌장 등이 경찰서로 찾아가 아버지를 풀어달라고 교섭을 했다. 연행된 지 1주일 후 나온 아버지는 얼마나 당했는지 집 계단을 올라오지도 못했다. 상처가 부풀어 올라 비누를 대지 못해 쌀겨로 몸을 씻겨 드렸다. 미음도 들지 못하고 누워계시다가 5월3일 숨을 거뒀다. 장례 전날 밤 형제나 친척들이 모여 ‘쓰야’ 라는 의식을 하는 것이 관습인데 특고가 당장 화장을 하라고 했다. 들에서 나무장작을 가져다 내가 불을 붙였다. 특고는 국적이라고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했다. 마을에서 장례조차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비판이 일자 결국 1개월 뒤에 ‘촌장’(마을의 장례)으로 치렀다. 촌장은 촌의회의 의결을 거쳐야 한다. 출정 군인 의식을 치러야 하므로 11살의 어린 내가 신관 노릇을 했다. 옆 마을의 신관에게서 몸가짐을 배웠고 어려운 한자로 된 축문을 읽지 못하니 어머니가 평이한 일본어로 써준 것을 읽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정식으로 자격을 따 1952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마을을 떠날 때까지 신관을 했다. 그 후로는 어머니가 신관을 88살까지 했다.”

 -8·15 후에는 어떻게 됐나?

 “이곳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살림이 어려웠던 때라 맨발로 돌아다녔다. ‘지옥의 계곡’을 지나곤 했는데 아버지의 인연으로 조선인들과 사이좋게 지냈다. 조선인들이 불러 곱창을 구워주거나 술을 먹게 해서 그런지 내가 술이 세다.”

 -지옥의 계곡이 뭔가?

 “탄광에서 일하다 부상당한 조선인이 쫓겨나면 갈 곳이 없으니 산과 산 사이에 습기가 많은 데 거처를 잡았다. 사람 살기가 어려운 곳이지만 동포들이 모여 집단 거주마을이 됐다. 조선인들은 술 마시면 일제 때나 전후에 고생했던 사연들을 털어놓았는데 나는 그것을 재미있게 들었다. 언젠가 낙반사고 등을 얘기해 그런 것을 써보라 했더니 교육받은 것이 없는데 어떻게 쓰냐고 하더라. 자신들의 인생에 대해 책을 백 권이라도 쓸 수 있을 터인데 배우지 못했다고 하니…. 그 때부터 글을 쓰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중학교 1, 2학년 때는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요즘과 다른 세상이라 도쿄의 대학에 진학한 대학생들이 마을에 내려오면 놀러가 얘기를 듣곤 했다. 학생운동이나 사회정세, 조선인 문제 등에 대해 얘기가 나왔다. 중 3때 와세다대에 가려고 결심하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동포들은 광산감독국의 허가 없이 석탄을 몰래 캐는 ‘다누키보리’ (두더지 파기)를 했다. 지표에 석탄광맥이 있으면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파서 들어가는 것이다. 여름방학 때 동포들과 같이 일을 해 돈을 꽤 벌었다.”

 -어떻게 르포를 쓰기 시작했나?

 “와세다대를 다니다가 광산현장을 체험하기 위해 4학년 때 그만뒀다. 향리로 돌아와 인근 지자체의 공무원으로 일하며 공해문제 등에 대한 사회교육을 담당했다. 1970년 직장을 그만 두고 카메라 하나를 들고 현장을 돌아다녔다.”

 
서재 들보에 걸려 있는 하야시 에이다이의 저술 예정 책 이름.
서재 들보에 걸려 있는 하야시 에이다이의 저술 예정 책 이름.

 -초기에는 공해 문제를 다룬 책들을 냈는데, 조선인 문제를 처음으로 다룬 책은 무엇인가?

“지쿠호갱부무덤(1978년 출판)이다. 갱내에 직접 들어가 일을 하지 않으면 체험르포를 쓸 수가 없다. 나는 현장주의자라 집에는 별로 없었고 탄광주택 단지에 들어가 일을 하며 살았다. 단지에 천명이 산다면 한 사람씩 찾아가 만났다. 그렇게 얼굴이 알려지고 친해지면 낡은 앨범 속의 사진이나 기밀문서를 들고 오는 사람이 있다. 일제 때 광부 숙사나 입소 때 찍은 촬영사진은 그렇게 입수한 것이다. 일반 광부뿐만 아니라 그들을 부려먹었던 수용소 사감, 노무과장이나 청원순사 등도 찾아다녔다. 이들을 함께 취재하지 않으면 절대로 제대로 된 기록을 쓸 수 없다. 나쁜 짓을 많이 해 8·15 후 한동안 도망 다녔던 사람들이니 그저 감추려 했다. 이들의 입을 여는 것은 여자를 꼬이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웃음) 한국에도 40회 정도 갔다. 대만도 10년째 취재하는 것이 있어 얼마 전 다녀왔다.”

 -한국말을 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취재를 하나?

 “내가 만나는 사람은 대체로 노인들이니까 일본말을 한다. 한국에 갈 때마다 다시 인사하러 가 인간관계가 넓어졌다.”

 - 패전 직후 일본 정부나 기업이 민감한 자료를 다 태웠다고 하던데 자료의 장벽을 어떻게 극복했나?

 “뭔가 있다 싶으면 밤에 사무소에 몰래 들어가 찾기도 했다. 낮에 가서 정중하게 애기하면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8·15 후 태웠다거나 없다고 둘러댄다. 그렇게 어렵게 자료를 모아 낸 것이 <전시외국인강제연행관계사료집>(1990·91년 간행, 4부로 나뉘어 모두 8권)이다. 250질을 찍었는데 대단히 귀중한 원자료들이다. 도의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하지 않았으면 이런 자료집을 낼 수도 없었다. 지인을 통해 한국외국어대학교 도서관에 한 질을 기증한 바 있다.” (확인해보니 현재 한국외대 용인분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2005년에 <중폭특공 사쿠라탄기>라는 책을 냈는데 일제가 중폭격기도 자살공격에 투입했나?

 “일본 군부는 전쟁 말기 전투기의 가미가제 공격으로도 미군의 진공을 막지 못하자 항공모함이나 전함을 단번에 격침할 수 있도록 중폭격기 특공대를 편성했다. 4식중폭격기를 개조해 무려 3톤의 초대형 폭탄을 싣도록 한 것이 사쿠라탄기다. 규슈 후쿠오카현의 다치아라이비행장에 배치했는데 출격을 앞두고 특공대원들이 송별회를 하던 45년 5월22일 밤 사쿠라탄기 한 대에 화재가 발생했다. 헌병은 조선인 야마모토 오장을 용의자로 바로 체포했다. 야마모토는 전쟁이 끝나기 1주일 전인 45년 8월8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내가 취재한 바로는 조선인이라고 아무런 증거 없이 죄를 뒤집어씌운 것 같다.”

 -우익에서 당신의 책을 면밀히 분석하는 전담팀이 있다는 얘기가 있던데.

 “책이 나오면 반년 정도는 바쁘다. 무언의 협박전화가 오거나 면도날 등이 우편으로 배달된다. 이곳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내가 모았던 자료는 인근 가마시에 설립된 우스이평화기념관에 다 보내고 여기에는 복사본만 두고 있다. 화재나 사고로 소실될 우려가 없으니 안심이다. 나는 부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친척 중에는 일제 때 조선에 가서 대지주가 됐거나 총독부 관료를 한 사람도 있다. 어느 의미에서는 조선 침략의 공범자였다. 그것에 대한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도 있다.”

 -목이 쉬고 피곤해 보인다. 괜찮나?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얘기해야지, 유언 같은 느낌이….”

 질문을 더 하기가 어려웠다. 하야시는 현재 <지쿠호 군함도-조선인 강제연행을 돌아보다>의 교정쇄를 보고 있다. 오는 4월 초순 출간 예정이라고 한다. <2부 끝>

다가와/글·사진 김효순 대기자

hyoskim@hani.co.kr

하야시 약력

1933년생

와세다대 중퇴

논픽션 작가

저서 <강제연행 강제노동-지쿠호 조선인 갱부의 기록>(1981), <여자들의 풍선폭탄>

(1985), <청산되지 않은 쇼와>(1990), <잊혀진 조선인 황군병사>(1995), <대만고사의용대>(1998)

평화협동저널리스트 기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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