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은 “요즘 보면 4·19를 높이 평가하는 게 권력에 위해가 된다고 보는 묵시적인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민주화와 산업화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다. 이명박 정부가 먼저 나서 4·19 50주년, 5·18 30주년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민주화’ 기록하는 김정남 전 청와대 수석
그가 쓴 책 <4·19혁명>은 박두진의 시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들의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그 붉은 선혈로 나부끼는/ 우리들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 / 우리는 아직/ 우리들의 피깃발을 내릴 수가 없다./ 우리들의 피외침을 멈출 수가 없다./ 우리들의 피불길,/ 우리들의 전진을 멈출 수가 없다./ 혁명이여!” ‘혁명’이란 말이 가슴을 뛰게 하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4·19가 그랬다.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의 말처럼 “4월만 되면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산기슭의 진달래꽃을 한아름 꺾어 수유동 4·19묘지로 찾아가던 시절이었다. 올해로 혁명 50돌을 맞았지만, 4월19일은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지나치듯 그렇게 일상적으로 지나갔다. 꼭 천안함 사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 주말, 김정남(68)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을 만났다. 4·19 50돌을 앞두고 우연히 그가 쓴 책 <4·19혁명>을 읽은 게 계기였다. 그는 4·19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 30여년 역사를 온전히 증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으로 꼽힌다. 60~80년대의 숱한 성명서와 선언문이 그의 손끝에서 나왔고, 지금도 이 자료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4월이 지금은 잊혀졌지만, 예전엔 살아 있었죠, 살아 있는 역사였죠”라고, 회한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60~80년대 선언서 쓰다 YS때 청와대행
“지금 아는걸 그때 알았더라면…미숙했다”
-올해가 4·19혁명 50돌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4·19의 의미가 뭐라고 보십니까? “나는 민주주의라는 게 기본적으로 국민이 원하지 않는 정부를 타파·폐지할 수 있다는 국민의 혁명권을 담보로 존립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4·19라는 것은 그 자체로 국민의 혁명권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런 생각이 이후 60년대, 70년대, 80년대에도 6월항쟁으로 이어져서 민주화를 쟁취하는 정신적 바탕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진으로 치면 원판 같은 거죠.” -하지만 4·19를 기억하는 분위기는 50돌임에도 덜하다는 느낌입니다. 정부 주최 행사도 볼 수 없구요.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저는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민주화와 산업화의 쌍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서도 민주화가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가장 큰 자랑거리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 부분이 소홀하게 취급되어 지금은 완전히 형편없이 산업화에 밀리거나…. 우리나라의 상징거리라면 광화문인데 그곳이 실제 4·19혁명의 현장이고 거기서 죽고 울부짖고 했는데, 그런 광화문광장이 4·19광장이 되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그 무렵(1960년대 중반) 백기완씨가 쓴 에세이를 보면 ‘돌아와 탑을 부수라’는 말이 나오는데, 백기완씨가 자기 딴에는 의분에 차서 왜 4·19 영령들을 수유리 골짜기에 가둬 놓느냐, 수유리 골짜기에 있지 말고 탑을 부수고 광화문으로 돌아와라, 그런 정열적인 글이었어요. 광화문에 세계 속에 우뚝 선 한국이나 문화 한국, 산업화를 상징하는 상징물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민주화의 중요성을 생각하고 되짚어보는 발상 자체가 없는 게 아닌가 싶어 아쉽습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이 “민주화운동 30년은 김정남의 삶 자체였다”고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 대학(서울대 정치학과 61학번) 졸업 이후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옛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면 네가 살아온 삶을 자술서로 쓰게 했는데, 그때 종이를 보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싶은 적이 있었죠. 다른 사람은 계장도 하고 과장도 하고 여러 절차를 거쳤겠지만, 우리는 한번에 여기까지 온 느낌,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특별한 계기보다 어쩔 수 없는 역사의 힘이랄까,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또 하나는 제가 1964년 6·3사태 때 배후조종자로 몰려 투옥이 됐어요. 23살 때인데, 그때 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이영희(리영희) 선생을 처음 만났어요. 이영희 선생은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였는데, “이집트가 북한을 인정했다”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붙잡혀온 거였어요. 그때 보니까, 국사범·사상범으로 몰리면 상당히 자기 제한을 많이 받더구라요. 자유스럽게 뛸 수 없게 한 사회적 여건도 나를 그런 길로 가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영희 선생과는 그때 인연을 맺으신 거네요. “이영희 선생과는 인연이 많죠. 이 선생 어머니가 위경련인가 위통을 자주 앓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연한 기회에 로열젤리를 구했는데 그걸 드렸더니 드시고 효험을 본 모양이에요.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 선생이 그걸 잊지 않고 아주 고마워했죠. 이영희 선생이 요새는 단호하고 명쾌하지만, 예전에 <조선일보> 있을 때 보면 독서량은 많지만 사회에 대한 냉소라든지 그런 게 많았어요. 이 선생이 (60년대에) <정경연구>(<월간경향>의 전신)에 글을 썼는데, 그게 <세대> <사상계> 이런 잡지와 더불어 상당한 역할을 했죠. 이영희 선생이 우리 지식인 사회에서 중요한 필자로 되는 과정에 그 잡지가 큰 역할을 했죠.” 1970~80년대 민주화운동 주요 사건 뒤엔 항상 그가 있었다. 유신 시절의 김지하 양심선언,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 의문사 폭로에 관여했고, 1987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진상이 조작됐다’는 성명서를 작성한 이도 그였다. 그의 민주화운동 기록은 2005년 <진실, 광장에 서다>란 책으로 묶여 나왔다. 그는 1993년엔 김영삼 정부에 참여해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2년 가까이 일했다. 재야에서 권력 핵심부로 진입했던 경험에 대해 그는 “국정 운영은 상당한 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지금 아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하는 게 참 많다. 준비도 없었고 미숙했다”고 말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무엇인가요? “양심선언 운동입니다. 1974년 7월 지학순 주교가 양심선언이란 것을 했어요. ‘나는 진리에 반하고 양심에 반하기 때문에 긴급조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한다. 유신헌법도 자연법에 어긋나 한 사람이 영구집권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정하지 아니하겠다. 이것 외의 어떤 발표도 나의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기 바란다’, 이런 내용이었어요. 그때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 하나가 뭐냐면, 협박과 공갈에 의해 허위진술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잡혔을 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양심의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겠는가 그런 걸 고민하게 됐어요. 그래서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 양심선언 운동을 제안했어요. 내가 끌려가거나 허위자백을 하거나 그런 경우에 대비해서 자기의 정당성을 교회나 믿을 수 있는 기관, 사람에게 맡겨두고 가자, 그렇게 양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자고 한 거죠. 1975년 2월일 겁니다. 박정희가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투표를 하겠다고 하던 무렵이에요. 양심선언 운동을 제창하고 나서 바로 반응이 왔습니다. 여주의 국민학교(초등학교) 여교사였는데, 이 교사가 유신 투표에 찬성하도록 교사들을 강제하고 독려하는 걸 폭로하는 양심선언을 했습니다. 그 후에 양심선언이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양심을 지킬 수 있는 중요한 수단과 방법으로 많이 원용됐습니다.” -가톨릭 쪽에서 많이 활동하시면서 김수환 추기경과 가까우셨는데, 선생님이 보신 김 추기경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사랑이 상당히 넘치되 지나치지 아니하고 위엄이 있되 따뜻함이 있어서 딱딱하지 아니하다’고. 나는 김수환 추기경을 가졌다는 게 70~80년대 우리에게 엄청난 위안이고 행복이었던 것 같아요. 거친 목소리의 투사는 아니었지만 할 얘기는 다 했고, 경제적으로 누굴 감싸주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분이 있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고 했던 사람이죠.” -4·19와 1970년대 유신 반대 투쟁, 80년대 6월항쟁을 모두 현장에서 보셨는데, 같은 민주화운동이라도 차이가 있습니까? “있죠. 박정희의 독재가 교활하고 기술적으로 정보정치를 했다면, 80년대 독재는 굉장히 잔혹했습니다, 폭압적이었고. 그때 심정은 이보다 더 나쁜 정권이 있을 수 있냐 그런 거였어요. 4·19와 관련해 몇가지 더 말하면, 시인 이은상이 수유리 4·19 탑 비문을 썼는데 ‘해마다 4월이 오면’이란 구절이 있어요. 나는 민주주의를 가져온 엄청난 혁명을 너무 애상조로 쓴 거 아니냐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재판을 보러 부산에 갔는데, 피고인 중 한 사람인 김지희란 여학생이 최후진술에서 그 시를 읊었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맺힌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그 여학생도 울고 방청객들도 다 울었어요. 시라는 게 이런 게 있겠구나 싶어서 생각을 바꿨죠.” ‘50돌 기념식’ 정부 요식적 행사보며 씁쓸
‘혁명가’ 김재규 저격덕에 박정희 신화화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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