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증거조작 파문 확산] 국정원, 외국 공문서 조작까지 왜?
2007년 일심회사건부터 증거 엄격
유씨 사건도 검찰서 영사증명 퇴짜
2007년 일심회사건부터 증거 엄격
유씨 사건도 검찰서 영사증명 퇴짜
국가정보원은 1970~80년대 간첩 사건에서 혐의를 입증할 손쉬운 수단을 가졌다. 외국 주재 대사관에 ‘영사’로 파견된 국정원 직원이 발행하는 영사증명서에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은 북괴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라고 쓰면 법원은 이를 증거로 받아들였다. 이런 관행에 법원이 제동을 걸자, 급기야 국정원이 ‘탈북 화교 출신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에서 외국 공문서 위조라는 조작극을 벌인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영사증명서를 악용한 여러 사례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김양기씨가 1987년 12월 재일 공작지도원에게 국가기밀을 전달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 등)로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의 확정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당시 핵심 증거는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 전신) 직원이던 주일 한국대사관 홍아무개 영사가 작성한 영사증명서였다. 여기에는 ‘재일 공작지도원’ 김철주씨가 8살 때인 1952년에 조선청년동맹 선전부장으로 일했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도 법원은 증거로 인정했다. 김씨는 재심을 거쳐 2009년 7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법원이 영사증명서에 선을 긋기 시작한 것은 2007년 12월 이른바 ‘일심회’ 사건에 대한 대법원 선고 때다. 옛 민주노동당 내부정보 등을 북한에 넘긴 ‘일심회’ 사건에서 검찰은 주중 대사관 이아무개 영사의 영사증명서를 법원에 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영사증명서의) 목적이 공적인 증명에 있다기보다는 상급자 등에 대한 보고에 있는 것으로서 엄격한 증빙서류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당연히 증거 능력이 있는 서류라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다만 ‘영사가 공판에 나와 증언하면 진술서 증거로서는 인정 가능하다’는 취지의 판단을 덧붙였다.
지난달 11일 서울고법 형사9부(재판장 김주현)는 1983년 6월 간첩 혐의 등으로 징역 8년에 자격정지 8년의 확정판결을 받았던 김양수(78)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옛 안기부 직원이자 주일 한국대사관 영사였던 최아무개씨는 법정에 나와 1982~1983년 자신이 세 차례 발행한 영사증명서에 대해 증언했다. 최씨는 “안기부 본부로부터 ‘피고인이 이 사건으로 입건되어 진술한 내용을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고 영사증명서를 작성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원은 “영사증명서에 적은 사실을 뒷받침할 근거, 정보원, 정보수집 경위에 관해 어떤 자료도 제시하지 못하고 작성 경위에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영사의 법정 증언의 신빙성도 법원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이번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에서도 국정원은 지난해 9월 말 유우성(34)씨의 2006년 5월 전후 중국-북한 출입경기록 내용이 담긴 영사증명서를 검찰에 건넸다. 하지만 검찰이 ‘더 공신력 있는 자료’를 요구하자, 국정원은 중국 화룡시 공안국이 발급했다는 유씨의 출입경기록 공문서를 건넸다. 중국 정부가 위조됐다고 한 문서다.
이재승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예전에는 영사가 만든 ‘찌라시’(영사증명서)를 증거로 냈는데 이제는 증거를 훨씬 공식적인 틀로 갖춰서 내야 한다. 형식적으로 진화한 증거를 내다 보니 ‘위조’라는 더 큰 위험에 직면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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