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강화군의 작은 섬 미법도는 겨우 100여가구가 사는 작은 섬이다. 이 섬에서만 간첩사건이 네 건 터졌다. ‘고문기술자’로 악명 높은 경찰 이근안은 미법도 간첩사건을 적발한 공으로 <조선일보>가 주는 청룡봉사상을 1979년 수상해 경감으로 특진하기도 했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만든 미법도 납북 어부 간첩단 사건 체계도.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한홍구의 간첩이야기
① 간첩이란 무엇인가
① 간첩이란 무엇인가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는 국정원 과거사위(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2004~2007) 민간위원으로 있으면서 송씨 일가 간첩단, 진도 간첩단, 정영 사건 등의 진실을 조사했습니다. 이때의 진실규명을 바탕으로 이 사건들은 모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만, 21세기에도 간첩조작 사건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제대로 알았더라면 반복하지 않아도 됐을 간첩조작의 역사. 한홍구 교수가 3부작으로 정리했습니다.
한국전쟁 종전 이후 남쪽의 방첩당국이 적발한 간첩은 모두 4500여명에 달한다. 이들 중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거나 재심 재판이 진행중인 사건도 수십건이다. 과연 수많은 간첩사건 중 몇 건쯤이 조작된 사건일지는 누구도 자신있게 얘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권총이나 수류탄 같은 무기도, 독침이나 무전기도, 하다못해 난수표나 암호문도 나오지 않은 간첩사건이라면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1950년대나 1960년대의 간첩사건들을 보면 조작된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간첩사건이 북한에서 직접 남파된 사람을 중심으로 한 순도 높은 간첩사건들이었다.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손으로”
1970년대 이후 조작간첩이 늘어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이 간첩을 안 내려보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북한이 간첩을 내려보내지 않은 것을 흔히 7·4 남북공동성명에 따른 신사합의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북한이 간첩 침투를 중단시킨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한국전쟁 때 월북한 남쪽 출신들 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선발·교육하여 남쪽으로 침투시켰다. 1950년대에는 별다른 문제 없이, 그리고 1960년대 초반만 해도 남쪽 출신들이 그럭저럭 연고지에 정착하거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지만, 북한이 정작 공세적인 대남전략을 펼친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간첩을 보내는 족족 주민들의 신고 등으로 남쪽 당국에 적발되었던 것이다.
애써 교육시킨 공작원들이 침투 즉시 적발되자 북한 당국은 검문을 피하기 쉬울 것이란 생각에 남성과 여성을 부부로 짝지어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간첩 교육을 남성들이 했던 탓일까, 남파된 여성들은 남쪽 출신이었음에도 15~20년 사이에 변화된 생활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자신이 북에서 왔음을 드러내곤 했다. 시꺼먼 원통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거기서 불이 피어오르고 사람들이 그것으로 방도 데우고 밥도 지어 먹는 것을 신기하게 보며 “저게 뭐예요?”라고 묻는 사람이 바로 간첩이었다. 1970년 군산에서 적발된 유문희·이점순 부부간첩 사건도 이렇게 해서 적발되었다.
간첩침투는 엄청난 고비용 저효율이었다. 그런데도 북쪽은-당시 남쪽도 마찬가지였지만- 죽어라 하고 간첩을 침투시켰다. 특히 베트남전쟁의 분위기 속에서 북한 당국은 대단히 공세적인 대남전략을 펼쳤다. 북쪽이 공세적으로 간첩을 많이 내려보냈으니, 남쪽의 방첩당국도 바쁠 수밖에 없었다. 통혁당 사건, 1·21 청와대 기습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을 거치면서 남쪽의 방첩당국이 기구를 크게 확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북쪽이 갑자기 간첩을 내려보내지 않은 것이다!
남한의 반공태세가 점차 강화되고 북한이 대규모 무장공작대를 파견하여 빈농들이 주로 사는 울진과 삼척의 산간 오지에 농촌해방군을 건설하려던 공작이 주민들의 신고로 실패로 돌아가자 북한도 대남정책을 크게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 당대회에서 북한은 당의 모든 사업을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정비하면서 대남사업전략에서는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손으로”라는 구호를 채택했다. 이후 북한이 직접 간첩을 남파하는 일은 근절된 것은 아니라 해도 크게 줄어들었다.
대한민국의 안보와 남북관계를 생각할 때 간첩 남파가 격감한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었지만, 방첩 일선의 대공수사요원들로서는 직업 안보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분명히 하기 위해 간첩은 반드시 필요했다. 오지 않으면 만들어내기라도 해야 했다. 1960년대까지의 간첩사건을 보면 더러 불순물이 섞여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이 순도 높은 북한산 간첩이었던 반면에, 1970년대에 접어들면 재일동포, 납북어부, 유학생 간첩 등 ‘메이드 인 재팬’이나 ‘메이드 인 사우스코리아’의 순도가 팍 떨어지거나 짝퉁 수준의 간첩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잠시 국정원 과거사위 시절에 작성한 시대별 간첩사건 추이 표를 통해 간첩사건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자.(그래픽 참조) 50년대에는 휴전선을 넘다가 또는 해안선으로 침투하다가 사살되는 간첩이 5% 미만일 정도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 식은 죽 먹기였다. 당시 공안당국은 당국이 적발하는 간첩이 전체의 60% 미만일 것으로 보았다. 60년대에 들어오면 적발된 간첩의 절반가량이 휴전선이나 해안선에서 사살되었고, 생포된 간첩의 경우도 50년대에 비해 남쪽 침투에서 체포까지 걸리는 기간이 불과 며칠 이내로 지극히 짧아졌다.
1970년대로 들어오면 50년대나 60년대에 비해 적발된 간첩의 수가 40%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북한이 직접 파견한 직파간첩의 비율은 50년대 90.9%, 60년대 75.9%에서 70년대는 42.1%로 격감했고, 80년대는 다시 27.9%로 또 크게 줄었다. 90년대 적발된 간첩 114명 중 32명이 직파간첩이라지만 그중 25명이 북한에서 훈련 중 기계 고장으로 표류하여 강릉 앞바다에서 발견된 강릉 잠수함 사건 관련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90년대의 직파간첩 비율은 더 크게 줄어든 것이 된다.
1950~60년대 초까지 북한은
월북한 남한 출신들 보내
연고선 활용 공작 펼쳤지만
번번이 방첩당국에 적발되자
1970년대는 간첩 잘 안 보내
존재 이유였던 간첩 줄어들자
대공수사요원은 밥줄 지키려
재일동포, 납북어부, 유학생 등
순도 떨어지거나 짝퉁 수준의
간첩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전향한 박병엽 제보에 꿰맞춘 송씨일가 사건 직파간첩의 경우 간첩 방조나 불고지 정도가 간첩단으로 묶여 고문을 당하고 중벌을 받는 등 간첩죄의 확대적용을 둘러싼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사건 자체를 조작했다는 시비는 많지 않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새로운 간첩의 공급원으로 등장한 재일동포 사건, 유학생 사건, 납북어부 사건, 월북자 가족 사건의 경우에는 조작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질 않았고,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등에서 재조사한 사건으로 재심 재판이 끝난 사건은 단 한 건의 예외도 없이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70년대의 간첩사건 중 주목할 사건은 1974년 3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울릉도 간첩단 사건이다. 방첩당국은 사건을 발표할 때 ‘사상 최대 규모’라든가 ‘최장 시간 암약’처럼 규모나 활동 시간을 부풀리곤 한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은 울릉도와 경상북도 일원에 사는 전씨-김씨 일가가 관련된 사건과 전북대학교 이성희 교수가 관련된 사건 등 전혀 상관이 없는 두 개의 사건을 하나로 합쳐 최대 규모라고 발표해버렸다. 중앙정보부가 이런 꼼수를 쓴 이유는 이 사건을 발표할 당시가 유신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고 채 3주가 안 되어 유신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일으켰다. 남북의 간첩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건은 박병엽 사건이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자 북쪽은 다시 과감한 대남전술을 채택했다. 북한은 박정희의 사망으로 남쪽 요인들의 동요가 극심할 것이라 기대하고 이들을 포섭하려는 공작을 준비했다. 그 대상으로는 대만 주재 대사로 있던 전 공군참모총장 옥만호가 선정되었다. 당시 북한의 대남사업부서의 핵심적인 자리에 있던 옥만호의 ‘불알친구’ 박병엽은 대만에 잠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 대만의 정보당국이 이 계획을 포착하여 대만에 잠입하려던 박병엽 일행을 체포하여 이들을 남한 당국에 넘겨주었다.
박병엽은 기가 막힌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제보가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 김정인·석달윤 사건(1980), 정춘상 사건(1980), 박동운 사건(1981), 송씨 일가 사건(1982) 등 여러 건의 간첩단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는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 사건으로 중앙정보부가 역적기관이 되어 보안사에 의해 초토화된 직후였다.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하면서 약간씩 힘을 회복한 중앙정보부는 박병엽으로부터 얻어낸 정보를 토대로 화려한 부활을 꿈꾸었다. 중앙정보부가 박병엽이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기대 밖의 성과를 거둔 사례로 전남 보성의 명문가 출신 정춘상(이순신 장군의 종사관이었던 정경달의 후손)을 적발한 것을 들 수 있다.
박병엽이 제공한 첩보로 놀라운 성과를 거둔 안기부(중앙정보부가 1981년 1월1일부터 이름을 바꿈)는 그가 제공한 두 가지 다른 첩보를 깊이 파고들었다. 하나는 송충건, 즉 송씨 성을 가진 인물이 충청도에 지하당을 건설한다는 첩보였다. 안기부는 충북 음성 출신으로 월북했다가 1960년 4월혁명 직후 남파되어 도쿄 유학 시절의 친구였던 민주당 정권의 전 재무부 장관 김영선 의원을 방문한 바 있던 송창섭을 송충건으로 지목했다. 안기부 청주지부가 처음 이 사건을 떠맡았는데, 충청북도는 해안선이 없어 통행금지도 없고 간첩도 자고로 침투해본 적이 없는 지역이었다. 간첩 수사를-따라서 조작도- 해본 적이 없던 안기부 청주지부는 두 달 동안 사건을 주물러 터뜨릴 뿐 물건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안기부 본부는 이 사건을 서울로 이첩하여 또다시 두 달 동안 관련자들을 고문하여 그 유명한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을 조작했다.(이 사건에 대해서는 2009년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다.)
박병엽의 또다른 제보는 진도에 박씨 성을 가진 월북자를 중심으로 지하당 공작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기부는 충청도에서 송창섭을 송충건이라고 추정할 때와는 달리 진도에서는 애를 먹었다. 모든 기록을 살펴봐도 진도 출신으로 박씨 성을 가진 월북자가 없었던 것이다. 겨우 찾아낸 것이 박영준이란 인물이 전쟁 시기에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안기부는 환상적인 가정법을 동원했다. 전쟁 때 행방불명된 박영준이 한 번도 고향에 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살았다면 북으로 갔을 것이고, 북으로 갔다면 남파공작원으로 선발되었을 확률이 높을 것이고, 남파공작원으로 내려왔다면 당연히 마누라와 아들을 만났을 것이고, 아들 박동운을 만났다면 당연히 대동입북했을 것이고, 박동운이 입북했다면 당연히 무전기를 갖고 내려왔을 것이고, 안기부의 수사망이 좁혀왔다면 박동운은 당연히 무전기를 파괴하여 증거를 인멸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박동운은 영문도 모르는 채 간첩이 되었다. 안기부가 증거랍시고 제출한 것은 나무막대기였다. 박동운이 이 나무막대기에 자귀날을 끼워 무전기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고문으로 간첩 만든 이근안의 특진
2007년 국정원 과거사위의 마지막 해에 간첩사건을 조사할 때, 인력과 시간 문제로 큰 사건 하나(송씨 일가), 중간 규모 하나(박동운 등 진도간첩단), 작은 규모 두 개(정영 사건, 차풍길 사건)를 고르고 나머지는 눈물을 머금고 기록을 들춰보지도 못하였다. 정영 사건은 처음에는 납북어부 사건으로 시작했는데, 재밌는 점은 불쌍한 납북어부 조져서 간첩 만드는 치사한 짓은 시골 보안대나 바닷가 경찰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나름의 ‘철학’과 국가 최고 정보기관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영은 납북어부였는데 재수없게도 얼굴도 잘 모르는 먼 친척이 전쟁 통에 북으로 가버렸다. 이 사건을 택할 때, 당시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송소연 선생이 정영 선생 사건 이야기를 들어보면 너무 억울하고 조작이 확실한데 한 가지 꺼림칙한 것은 이 사건이 간첩이 제보한 간첩사건이라는 것이었다.
간첩이 제보한 간첩사건의 실체를 조사하다 보니 참으로 기가 막혔다. 정영이 살던 미법도는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면 보문사가 있는 석모도가 있는데 석모도 동쪽의 선착장에 내려 버스를 타고 서쪽의 부두에서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작은 섬이었다. 겨우 100여호가 사는 작은 섬에서 간첩사건이 다섯 건 터졌다.(1건은 옆 섬 거주) 모두 같은 날 같은 배를 타고 납북됐던 사람들이 차례로 두들겨 맞고 간첩이 된 것이다. 그 간첩이 두들겨 맞으며 다른 어부를 지목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간첩이 된 것이었다. 정영은 그 마지막 희생자였다. 앞의 두 사건을 만들어낸 자가 바로 이근안이었고 이근안은 이 공으로 <조선일보>가 주는 청룡봉사상을 1979년에 수상하여 경위에서 경감으로 특진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가난한 어부들, 그 당시 지식인들은 그래도 잡혀가면 변호사도 대고 누군가가 떠들어주고 했지만,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는 조그만 섬의 어부들이 줄줄이 사탕으로 간첩이 되었고, 이근안은 이런 지능적인 빨갱이들과의 심문 투쟁은 하나의 예술이라고 주장했다. 국선변호인은 억울하다는 정영에게 죄를 인정하고 판사의 자비를 빌라고 강권했고, 법정에서 궁둥이 살짝 들어 “선처를 바랍니다” 한마디로 변론을 끝냈다.
당시 방첩당국은 멀쩡한 사람을 두들겨 패서 간첩을 만들기도 했지만, 필요에 따라 멀쩡한 간첩의 침투 시기와 목적을 조작하여 대대적으로 선전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한창일 때 검거되었다고 발표된 홍종수를 들 수 있다.
1980년 5월24일 경찰은 “최근 학생 및 시민 시위가 극렬한 광주시에 잠입, 이들의 시위를 무장폭동으로 유도하고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려는 목적으로 남파된 북괴간첩 이창룡을 5월23일 서울에서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당국은 검거된 간첩의 이름이 이창룡이라고 했지만 그의 실제 이름은 홍종수였다. 경찰은 홍종수가 5월20일 침투하였고, 북한이 “국내 소요지역에서 즉각 암약할 수 있는 특수훈련된 간첩을 대량 남파”하고 있으며 홍종수도 “이번에 광주 일원에서의 공작임무를 띠고 남파”(<경향신문> 1980년 5월26일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홍종수가 북한을 출발한 것은 5월11일로 광주항쟁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이었고 남해안에 상륙한 것은 5월16일이었으니, 광주항쟁을 무장폭동으로 유도할 목적으로 남파되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날조였다. 홍종수에게 부여된 실제 임무는 속칭 ‘끈 떨어진 간첩’, 즉 자수하거나 검거된 것은 아닌데 난수표 분실 등으로 북한과의 연계가 끊어진 남파간첩의 선을 다시 이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홍종수는 전향하여 자신이 접선하려 했던 끈 떨어진 간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여 그 일가족이 검거되게 만들었고, 그의 제보를 바탕으로 이근안이 함주명 조작간첩사건을 만들었다. 홍종수는 이밖에도 서울시경 대공전략연구소, 공안문제연구소 등에 근무하면서 신학철 화백의 유명한 그림 <모내기>가 북한을 찬양하는 국가보안법 위반 작품이라고 감정하는 등 무수한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사상감별사로 활약했다.
행방불명된 아버지 간첩이 되고
조그만 섬의 어부들도
줄줄이 사탕으로 간첩이 됐다
가정폭력 살해당한 수지 김도
북한 공작원이라며 간첩이 됐다
1990년대엔 통일문제 관심 많은
운동권 출신들이 주요 타깃
1990년대 말부터는 탈북자들이
탈북 전후 안 국정원 직원에 의해
간첩으로 몰리는 경우도 생겼다
수지 김 사건 은폐 주역 장세동은 처벌 피해 간첩조작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1987년의 윤태식 사건이다. 1987년 1월2일 홍콩 주재 상사원 윤태식은 부부싸움 끝에 아내 김옥분(일명 수지 김)을 목 졸라 살해했다. 자신이 살 길은 북으로 망명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생각한 윤태식은 싱가포르로 가 북한대사관을 찾아가 대리대사를 만나 망명을 요청했으나, 북한은 그가 범죄자임을 눈치챘는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윤태식은 미국대사관을 찾아가 신변보호를 요청했지만 미국대사관은 윤태식을 한국대사관에 인계했다. 윤태식은 한국대사관에서 북한 공작원 김옥분이 자신과 위장결혼한 후 자신을 북으로 보내기 위해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으로 유인했지만 극적으로 탈출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안기부 싱가포르 파견관은 윤태식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어 그를 의심했고, 싱가포르로 날아온 안기부 해외담당 부국장 역시 윤태식의 주장이 거짓임을 간파했다. 이들은 안기부 본부에 윤태식의 납치 주장이 허위이니 기자회견 계획을 취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본부에서는 “국가정책적 차원에서 부장님이 결정한 것”이라며 기자회견을 강행하라고 지시했다. 안기부 수사담당부서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귀국한 윤태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아내 김옥분을 살해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하여 입북을 기도하였다는 자백을 받고 그를 살인죄와 국가보안법상의 탈출죄로 구속 송치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안기부장 장세동은 이미 대통령에게 납북 미수로 보고하였고 언론에도 그렇게 보도되었으니 구속하지 말고 “사건을 묻으라”고 지시했다. 1월26일 홍콩 경찰이 김옥분의 시신을 윤태식의 아파트에서 발견하였지만, 이때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국내 정세가 뒤숭숭할 때여서, 안기부는 이 사건을 꼭꼭 묻어버렸다. 윤태식과 공범이 된 안기부는 혹시라도 윤태식이 마음이 바뀌어 양심선언이라도 할까봐 전전긍긍했다. 윤태식은 1994년 카드빚을 갚지 못해 사기 혐의로 실형까지 살았으나, 그 후 벤처기업을 설립하여 지문인식 기술을 개발했다 하여 안기부가 그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실제로 윤태식은 지문인식 출입문 장치를 안기부에 납품하여 떼돈을 벌었다. 민주정권이 들어선 뒤 언론에서 이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취재를 시작하자 경찰도 내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국정원에 윤태식 사건 기록의 열람을 요청하였다. 당시 국정원 2차장 엄익준은 대공수사국장 김승일을 이무영 경찰청장에게 보내 수사 중단을 하도록 요구했고, 경찰은 이를 받아들였다. 윤태식은 2003년 5월 대법원에서 살인죄와 뇌물공여죄 등으로 징역 15년 6월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사건 은폐의 주역 장세동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북한의 대남공작 양상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광주학살의 충격과 학살정권의 폭압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1980년대 중반 한국 사회에는 ‘주사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극히 일부이지만 이북과 직접 손을 잡으려는 세력이 등장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현재는 전향하여 뉴라이트가 되었다. 주사파의 출현으로 북한은 크게 고무되었다. 북한은 1970년 5차 당대회 이후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손으로”라는 구호 아래 적극적인 대남전략을 시행하지 않았었지만, 주사파의 출현과 통일 열기의 고조, 민주화의 진전 등 새로운 상황변화에 맞춰 적극적인 대남공작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북한의 권력서열 22위이자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알려진 리선실이 서울에서 오랫동안 잠복하면서 다양하게 활동했으며, 1980년 사북사태 주역인 탄광노동자 황인오를 대동입북하여 중부지역당(일명 남한조선노동당)을 조직한 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다.
우방국 간첩 처벌 못하는 한국은 간첩 천국
남쪽에 ‘말이 통하는’ 운동권 출신들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북한은 이들과 선을 대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1995년 10월의 부여간첩사건이나 1997년 10월 적발된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다. 부부간첩 사건의 경우, 이들은 울산의 재야단체 간부 정대연을 찾아가 자신들은 북에서 왔다며 “선생님의 글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공화국에 같이 가실 수 없나 해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깜짝 놀란 정대연은 자신은 민주화운동만 할 뿐이라며 이들의 제의를 거절했다. 사무실에 돌아온 정대연은 이 사건을 안기부가 자신을 떠보는 공작이라 생각하고 당국에 신고한 뒤, 기자회견을 열어 이 사실을 폭로했다. 정대연을 떠보기 위해 사람을 보낸 적이 없던 안기부는 깜짝 놀랐다. 남쪽 사정에 어두운 부부간첩은 정대연이 자신들을 신고하고 또 기자회견까지 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정대연과 다시 만나려고 하다가 최정남은 검거되고 강연정은 자살했다.
일부 주사파들은 북쪽이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았다. 한때 ‘간첩 박헌영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란 글로 남쪽 주사파의 원조 노릇을 했던 김영환은 잠수함을 타고 북으로 가 직접 김일성을 만났다. 남으로 망명한 황장엽이 쓴 책으로 주체사상을 딸딸 외운 김영환은 정작 김일성을 만나보니 주체사상에 아무런 관심도 그 내용도 잘 모르더라며 전향해버렸다. 사상 최대 규모의 ‘지하 간첩단’이라는 민혁당의 수괴 김영환은 안기부에서 반성문 쓰고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은 반면, 그 조직원들 다수는 간첩으로 처벌받았다.
간첩사건도 흐름이 있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간첩 대다수가 북에서 직접 내려보낸 직파간첩이었다면, 1970년대와 80년대 간첩의 절대다수는 재일동포, 납북어부, 월북자 가족 등 사회적 약자였다. 1990년대에는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운동권 출신들이 간첩의 주된 공급원이 되었다. 1990년대 말부터 간첩업계에는 탈북자라는 새로운 블루오션이 등장했다. 이들 탈북자의 절대다수는 처음부터 ‘탈북’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고, 먹을 것을 찾아 국경을 넘었다가 얼떨결에 남쪽으로 오게 된 ‘얼떨리우스’들이라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남쪽에 정착한 이들은 북쪽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이들을 남쪽으로 데려오기 위해 다시 북쪽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처음 탈북 과정에서 만났거나, 하나원 심사 과정에서 인연을 맺게 된 국정원 직원들의 도움을 청하게 되는 일이 자주 있다. 일부는 순수하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정보요원의 속성상 다른 뜻을 품는 사람들도 꽤 많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탈북자 중에서 간첩으로 몰리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다.
북쪽이 탈북자를 가장해 남쪽으로 간첩을 보내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과 같이 조작된 것이거나 간첩사건이라 부르기에 함량미달의 사건도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촛불시위 와중에 발생한 ‘미녀간첩’ 원정화 사건이다. 간첩사건의 공소장을 숱하게 많이 보았지만 이 사건 공소장처럼 민망한 공소장은 보지 못했다. 무슨 공소장이 몇 회에 걸쳐 정을 통하고, 여관에 투숙하고, 동침하고 운운 일색이었다.
요즘 인터넷에는 없는 것 없이 다 있다. 외국에서 구글 어스로 보면 청와대나 국정원 주차장에 세워놓은 자동차 번호판까지 확인하는 건 일도 아니고 구글링을 잘하면 아주 고급스러운 정보까지 다 손에 넣을 수 있다. 최근의 간첩사건에서 국정원 대공수사국이 잡았다고 하는 간첩들이 수집한 정보의 (정보)가치는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정원이 한국 민주주의에 암적인 존재가 되었다면, 국정원 내부의 암 중의 암은 바로 대공수사파트다. 낡은 냉전논리에 사로잡혀 있는 대공수사국, 아직도 대한민국에 3만~5만명의 고정간첩이 암약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대공수사파트를 갖고서 국정원이 21세기 정보화시대에 걸맞은 선진국가의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될 수는 없다. 대공수사파트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국가보안법은 21세기 대한민국이 처한 환경에서 간첩을 막아내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형법상의 간첩죄도 마찬가지다. ‘적국’이 보내는 간첩만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이 진실로 경계해야 할 것은 미국 간첩, 일본 간첩, 중국 간첩이다. 외국인 간첩일 수도 있고 한국 국적자로서 해당 국가를 위해 정보와 기밀을 제공하는 내국인 간첩일 수도 있다. 사실 대한민국이 처한 국제환경에서 진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방국의 간첩이라 할 수 있다. 북한 간첩과 적국 간첩에만 매달려온 대한민국의 법체계로는 정말 우리 주변에 득시글거리는 우방국을 위해 복무하는 간첩들을 막아낼 수 없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간첩들의 천국이다.
[관련영상] [#9. 최성진·허재현의 토요팟] 여간첩 원정화 사건, 공소장이 수상하다
1950~60년대 초까지 북한은
월북한 남한 출신들 보내
연고선 활용 공작 펼쳤지만
번번이 방첩당국에 적발되자
1970년대는 간첩 잘 안 보내
존재 이유였던 간첩 줄어들자
대공수사요원은 밥줄 지키려
재일동포, 납북어부, 유학생 등
순도 떨어지거나 짝퉁 수준의
간첩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전향한 박병엽 제보에 꿰맞춘 송씨일가 사건 직파간첩의 경우 간첩 방조나 불고지 정도가 간첩단으로 묶여 고문을 당하고 중벌을 받는 등 간첩죄의 확대적용을 둘러싼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사건 자체를 조작했다는 시비는 많지 않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새로운 간첩의 공급원으로 등장한 재일동포 사건, 유학생 사건, 납북어부 사건, 월북자 가족 사건의 경우에는 조작을 둘러싼 논란이 끊이질 않았고,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등에서 재조사한 사건으로 재심 재판이 끝난 사건은 단 한 건의 예외도 없이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70년대의 간첩사건 중 주목할 사건은 1974년 3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울릉도 간첩단 사건이다. 방첩당국은 사건을 발표할 때 ‘사상 최대 규모’라든가 ‘최장 시간 암약’처럼 규모나 활동 시간을 부풀리곤 한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은 울릉도와 경상북도 일원에 사는 전씨-김씨 일가가 관련된 사건과 전북대학교 이성희 교수가 관련된 사건 등 전혀 상관이 없는 두 개의 사건을 하나로 합쳐 최대 규모라고 발표해버렸다. 중앙정보부가 이런 꼼수를 쓴 이유는 이 사건을 발표할 당시가 유신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발표하고 채 3주가 안 되어 유신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일으켰다. 남북의 간첩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건은 박병엽 사건이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죽자 북쪽은 다시 과감한 대남전술을 채택했다. 북한은 박정희의 사망으로 남쪽 요인들의 동요가 극심할 것이라 기대하고 이들을 포섭하려는 공작을 준비했다. 그 대상으로는 대만 주재 대사로 있던 전 공군참모총장 옥만호가 선정되었다. 당시 북한의 대남사업부서의 핵심적인 자리에 있던 옥만호의 ‘불알친구’ 박병엽은 대만에 잠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 대만의 정보당국이 이 계획을 포착하여 대만에 잠입하려던 박병엽 일행을 체포하여 이들을 남한 당국에 넘겨주었다.
10년간 숨어 살다 1999년 10월 자수한 이근안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행방불명된 아버지 간첩이 되고
조그만 섬의 어부들도
줄줄이 사탕으로 간첩이 됐다
가정폭력 살해당한 수지 김도
북한 공작원이라며 간첩이 됐다
1990년대엔 통일문제 관심 많은
운동권 출신들이 주요 타깃
1990년대 말부터는 탈북자들이
탈북 전후 안 국정원 직원에 의해
간첩으로 몰리는 경우도 생겼다
수지 김 사건 은폐 주역 장세동은 처벌 피해 간첩조작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1987년의 윤태식 사건이다. 1987년 1월2일 홍콩 주재 상사원 윤태식은 부부싸움 끝에 아내 김옥분(일명 수지 김)을 목 졸라 살해했다. 자신이 살 길은 북으로 망명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생각한 윤태식은 싱가포르로 가 북한대사관을 찾아가 대리대사를 만나 망명을 요청했으나, 북한은 그가 범죄자임을 눈치챘는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윤태식은 미국대사관을 찾아가 신변보호를 요청했지만 미국대사관은 윤태식을 한국대사관에 인계했다. 윤태식은 한국대사관에서 북한 공작원 김옥분이 자신과 위장결혼한 후 자신을 북으로 보내기 위해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으로 유인했지만 극적으로 탈출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안기부 싱가포르 파견관은 윤태식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어 그를 의심했고, 싱가포르로 날아온 안기부 해외담당 부국장 역시 윤태식의 주장이 거짓임을 간파했다. 이들은 안기부 본부에 윤태식의 납치 주장이 허위이니 기자회견 계획을 취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본부에서는 “국가정책적 차원에서 부장님이 결정한 것”이라며 기자회견을 강행하라고 지시했다. 안기부 수사담당부서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귀국한 윤태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아내 김옥분을 살해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하여 입북을 기도하였다는 자백을 받고 그를 살인죄와 국가보안법상의 탈출죄로 구속 송치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안기부장 장세동은 이미 대통령에게 납북 미수로 보고하였고 언론에도 그렇게 보도되었으니 구속하지 말고 “사건을 묻으라”고 지시했다. 1월26일 홍콩 경찰이 김옥분의 시신을 윤태식의 아파트에서 발견하였지만, 이때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국내 정세가 뒤숭숭할 때여서, 안기부는 이 사건을 꼭꼭 묻어버렸다. 윤태식과 공범이 된 안기부는 혹시라도 윤태식이 마음이 바뀌어 양심선언이라도 할까봐 전전긍긍했다. 윤태식은 1994년 카드빚을 갚지 못해 사기 혐의로 실형까지 살았으나, 그 후 벤처기업을 설립하여 지문인식 기술을 개발했다 하여 안기부가 그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실제로 윤태식은 지문인식 출입문 장치를 안기부에 납품하여 떼돈을 벌었다. 민주정권이 들어선 뒤 언론에서 이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취재를 시작하자 경찰도 내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국정원에 윤태식 사건 기록의 열람을 요청하였다. 당시 국정원 2차장 엄익준은 대공수사국장 김승일을 이무영 경찰청장에게 보내 수사 중단을 하도록 요구했고, 경찰은 이를 받아들였다. 윤태식은 2003년 5월 대법원에서 살인죄와 뇌물공여죄 등으로 징역 15년 6월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사건 은폐의 주역 장세동은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북한의 대남공작 양상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광주학살의 충격과 학살정권의 폭압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1980년대 중반 한국 사회에는 ‘주사파’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극히 일부이지만 이북과 직접 손을 잡으려는 세력이 등장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현재는 전향하여 뉴라이트가 되었다. 주사파의 출현으로 북한은 크게 고무되었다. 북한은 1970년 5차 당대회 이후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의 손으로”라는 구호 아래 적극적인 대남전략을 시행하지 않았었지만, 주사파의 출현과 통일 열기의 고조, 민주화의 진전 등 새로운 상황변화에 맞춰 적극적인 대남공작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북한의 권력서열 22위이자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알려진 리선실이 서울에서 오랫동안 잠복하면서 다양하게 활동했으며, 1980년 사북사태 주역인 탄광노동자 황인오를 대동입북하여 중부지역당(일명 남한조선노동당)을 조직한 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다.
1974년 3월 중앙정보부는 ‘사상 최대 규모’라며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사건 발표 뒤 유신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일으켰다. 같은 해 4월, 이 사건으로 검거된 32명이 서울형사지법(현 서울중앙지법)으로 첫 재판을 받으러 가고 있다. 당시에는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40년이 지난 올해 1~2월 재심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1975년 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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