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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탈북 여간첩 1호’의 진실은?

등록 2014-03-21 20:26수정 2014-03-24 16:22

[토요판] 커버스토리
보위부 소속 남파 간첩인가…한국 부적응한 탈북자였나
‘탈북 여간첩 1호’ 원정화씨는 정말 간첩일까. 간첩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몇 가지 증거와, 그 반대의 증거가 공존한다. 따라서 어느 한쪽에 쉽게 무게를 싣긴 어렵다.

원씨에 대한 검찰의 공소장을 보면, 그는 열다섯살 때인 1989년 청진시 남향고등중학교 재학 중 갑자기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사로청)에 선발돼 금성정치대학에서 공부했다. 그가 태어나기 직전인 1973년께 친아버지인 원석희씨가 남파됐다가 숨져 그는 ‘혁명열사 유자녀’로 대우받았다고 한다. 원씨가 갑자기 사로청에 뽑힌 이유는 이런 배경 덕분일 수 있다. 원씨는 1992년까지 남파 간첩 특수훈련을 담당하는 805훈련소에서 남파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는 것이 검찰 주장이다.

하지만 원씨를 네살 때부터 길러온 의붓아버지 김동순(2000년 12월 탈북)씨는 검찰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김씨 설명을 종합하면, 원씨는 1990년 청진시 고무산여자고등중학교를 다니다 중퇴한 뒤 가출을 자주 했다. 1991년 원씨가 최룡해 당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찾아가 ‘속도전 청년돌격대’에 선발해 달라고 부탁해 승강기 공장 노동자로 일하게 된 적은 있으나, 805훈련소에서 훈련받은 적은 없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김씨뿐 아니라 원정화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간첩죄로 5년간 교도소에 복역하다 지난해 7월 출소한 원씨는 지난 2월 아버지 김씨의 집을 찾아왔다. 5년 만의 재회였다. 이 자리에서 김씨가 “네가 무슨 보위부 남파 간첩이냐”고 거듭 추궁하자 원씨는 “나는 보위부의 보 자도 모른다. 황장엽 암살 지시를 받은 적도 없다”고 털어놨다. 1996년 탈북 이후 한번도 북한에 들어간 적 없다고도 했다. 검찰 공소장에 적힌 혐의 사실을 정면으로 뒤집는 발언이었다.

자신이 간첩이라고 시인했지만
출소 뒤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
“북한 갈 방법 물어본 적 있지만
탈북 이후 북한 간 적 없고
보위부의 보 자도 모른다” 털어놔

공소장 주요사실도 의심스럽다
연길에서 북한 지령 받았다는데
당시 함께 간 사람의 설명 달랐고
북한 지령 받고 일본 갔다는데
원씨는 일본말을 전혀 몰랐다

다만, 2004년께 대북무역 업무차 드나들던 중국 단둥 주재 북한무역대표부의 김교학 부대표에게 북한에 남아 있는 어머니가 그리워 북한에 돌아갈 방법이 없는지 문의한 적은 있다고 원씨는 털어놨다. 김 부대표는 이후 원씨에게 몇가지의 ‘심부름’을 시키며 남한 정보를 캐내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원씨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검찰이 꾸민 원씨 공소장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 원씨는 치밀하게 준비된 북한 보위부 소속 남파 간첩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북한에 돌아가고 싶어 이런저런 방법을 알아보던 탈북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원씨와 한국에서 가깝게 지냈던 지인들은 “원정화는 북한이 그립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고 <한겨레>에 전했다. 하지만 원씨는 지난 18일 <한겨레>와 만나 아버지에게 최근 고백한 내용들에 대해 “(어린 나이부터 보위부 요원에 선발됐다고 말하면) 아버지가 놀랄까봐 그렇게 설명드린 것”이라고 해명했다.

다소 석연치 않은 원씨의 이런 진술과는 별도로, 검찰 공소장에 나와 있는 주요 사실관계에도 의심스러운 구석은 많다. <한겨레>는 원씨의 친아버지인 원석희씨를 1973년 병원에서 치료한 적 있다는 익명의 탈북자(의사·83)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원석희는 품행이 바르지 못해 좋은 직장을 갖지 못하고 광산에서 일했다. 1973년 협심증 증세가 있어 내가 모르핀 주사를 놔준 적 있다. 원석희는 모르핀 중독 증세가 있었다. 원석희가 남파 간첩으로 선발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는 사람이다. 원석희는 (1973년이 아닌) 1987년께 지병으로 숨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원씨 공소장에는 그가 2005년 3월19일부터 23일까지 중국 연길시의 백산호텔에서 김교학 부대표를 만나 ‘군장교 포섭, 국정원 위치 파악’ 등의 지시를 받았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원씨의 연길시 방문 때 그와 동행했던 박종진(가명)씨 설명은 달랐다. 박씨는 원씨와의 결혼을 앞두고 연길시로 여행을 다녀온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박씨는 “원정화는 나와 연길에 방문했을 때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김교학 등) 다른 누군가를 만나러 간 적이 없다. 그때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설명했다.

원씨 공소장에는 또 “원씨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2007년 6월13일 일본 센다이시를 방문해, 북한의 중요 정보를 갖고 도망간 김아무개(여성)씨를 찾으러 다녔다”고 돼 있다. 그러나 북한이 일본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원씨를 일본에 갑자기 파견한다는 것은 상식과 맞지 않는다. 당시 원씨와 함께 일본을 다녀온 탈북 여성 정미자(가명)씨는 원씨가 누군가를 찾아다닌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정씨는 “결혼중개업소의 소개로 원정화와 함께 돈 많은 일본인과의 결혼을 알아보러 센다이시에 간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원정화는 일본말을 전혀 몰라 일본 체류 내내 센다이시의 숙소에만 머물렀고, 김동순씨 외에는 누구와도 통화를 하지 않았다. (북한 정보 빼돌린) 누군가를 찾으러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공소장에 왜 그런 내용이 쓰여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원씨를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었던 동거남들은 공통적으로 “원정화는 간첩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한 남성은 “원정화는 계산 하나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보위부 요원으로 선발될 수 있는 지적 수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남성은 “(원정화가 체포된) 2008년 검찰에 참고인 조사를 받으러 간 적 있다. 뭔가 큰 줄거리를 그려놓고 증언들을 억지로 꿰어맞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원정화는 간첩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같이 살아보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국정원은 2008년 1월부터 7월까지 원정화의 전화통화 내용을 도청했다. <한겨레>가 이 자료를 입수해 분석해 보았지만, 원씨에게서 특별히 간첩으로 의심되는 통화 내용은 발견되지 않았다. 김교학 북한 단둥무역대표부 부대표와도 단순한 무역 관련 대화가 전부였다. 원씨의 혐의 내용과는 거리가 있는 자료였다.

원정화 사건을 오랫동안 추적해온 장경욱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는 “원정화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황이라 주변의 환경에 따라 말이 달라지기 쉬운 인물”이라고 말했다. 원씨의 진술에 주로 의존했던 검찰 수사의 신빙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원씨의 진술조서를 보면 그는 정신적으로 심하게 불안한 상태에서 조사받았음을 알 수 있다. 경찰과 검찰에서의 진술이 뒤바뀌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경찰 진술 때는 미군기지 11곳의 약도를 북에 건넸다고 했다가 검찰에서는 6곳으로 말을 바꾸고, 일본에서 스파이를 잡아오라는 지시를 받았던 시점을 경찰 진술 때는 2002년이라 하다가 검찰에서 2006년으로 바꿨다. 경찰 진술 때는 대북무역으로 얻은 이익금을 단둥 무역대표부로 보냈다고 하다가 검찰에서는 아버지 김동순씨로 바꾼다. 원씨는 조사 당시 이러한 잦은 오류에 대해 “제가 요즘 (정신과) 약을 먹어 정신이 오락가락한다”고 설명했다.

또 원씨는 출소 이후 몇몇 종합편성채널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사실이 아닌 말들을 자주 내뱉어 스스로 신뢰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원씨는 지난해 12월 한 종편 프로그램에 출연해 “(2001년) 나는 합동신문센터에서 거짓말탐지기 조사도 통과했다”며 국정원을 속이고 위장 탈북자로 자리잡는 데 성공했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러나 원씨는 당시 임신 9개월째여서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면제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원정화를 간첩으로 의심하게 만드는 정황들도 존재한다. 그가 중국 선양(심양) 주재 북한 영사관을 드나드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자가 있다. 탈북자가 북한 단둥 무역대표부를 드나들며 태연하게 무역을 했다는 것도 북한이 뒤를 봐줬다는 의혹에 힘을 싣는 이유다. 무엇보다 원씨 스스로 간첩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검찰의 회유와 압박이 있었다 하더라도 5년형의 감옥살이를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와 관련해 원씨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내가 간첩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나와 관련해 떠드는 것에 화가 난다. 나를 정확히 알고 싶으면 나를 찾아와서 얘기를 들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장경욱 변호사는 “원정화의 말에만 의존한 원정화 공소장 내용은 검증하면 할수록 허점이 드러날 것이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 조작 사건처럼 제대로 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탈북자 출신인 김형덕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장은 “원정화가 나왔다는 금성정치대학은 고등학교 졸업 뒤 군인 또는 사회생활을 하다가 특별 추천 형태로 선발되어 교육받는 청년간부 양성 대학이다. 고등학교 졸업 전에 금성정치대학에서 공부를 했다는 것도 이상하다. 원정화는 간첩이 아닌 것 같다는 게 탈북자 사회의 전반적 평가”라고 말했다.

허재현 기자

[관련영상] [#9. 최성진·허재현의 토요팟] 여간첩 원정화 사건, 공소장이 수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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